아무 말도 하기 싫을 때, 아무 말도 필요 없을 때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아무 말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말하는 순간 구차해지거나 되려 한심해지기 때문이다. 가슴에서 철문 두 개가 날카롭게 닫히는 소리가 나고 심장은 더 쿵쾅거린다. 얼굴은 전기가 흐르는 듯 찌릿해지고 팔다리에서 힘이 빠지는 느낌이 바로 그때 온다. 하고 싶은 말이 거품처럼 쌓이다가 한순간에 거품이 터지듯 어떤 말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살면서 그런 순간이 많았다.
상견례 자리였다. 아버지는 사돈이 될 사람 앞에서 딸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공부하고 학교 다니는 것 말고는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의 방어를 이해하면서도 그 방어를 왜 우리 아버지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제대로 할 줄 아는 거 없는 둘이서, 제대로 하는 법을 몰라 만났는데 당연한 듯 우리 아버지는 설레발을 치고, 상대 아버지는 흐뭇하게 바라보는 순간 나는 눈을 감고 숨만 쉬고 있었다. 남자 친구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크게 바라지 않아요. 기본만 하면 돼요. 나는 엄마가 이 말을 하기 바랐다. 우리 집은 크게 바라고 있어요. 사위가 그 기본보다 더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사람 같아 결혼시키려고요. 그러나 엄마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다고만 했다. 시종일관 그쪽은 흐뭇해하고 우리 쪽은 고마워할 뿐이었다.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밥만 먹었다.
첫아이를 낳은 후 친정에서 몸조리를 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출산 후 고통이 왔다. 폭격 맞은 몸은 우울했다. 엄마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에 화를 냈다. 누워 있다 상체를 일으키려 손을 짚으면 손목이 나간다고 했고 몸에서 냄새가 나서 옷을 갈아입으면 몸에 바람이 든다 했다. 회음부가 아파서 앉아서 미역국을 못 먹으면 젖 안 나온다고 역정을 냈다. 내가 잠을 못 자서 괴로워하면 밤낮 가리지 말고 애 잘 때 자라고 말했다. 내가 아기를 보며 우울해하면 엄마가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남편 있는데 뭐가 힘드냐고 했다. 남편은 친정이라 그나마 편한 거라며 날더러 마음을 바꾸라고 했다. 집에 가면 많이 도와주겠다고, 모든 엄마가 아기를 낳고 겪는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 시절 내 가슴의 문은 여러 번 굉음을 내며 닫혔다. 아기와 나 빼고 모두 사라졌으면 싶었다.
아이는 자주 열이 나고 감기에 걸렸다. 어느 순간 아이 이마만 짚어도 소수 첫째 자리까지 체온을 예상했다. 기침 소리만 들어도 항생제가 필요한지 아니면 거담제가 필요한지 등에 붙이는 패치가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내가 깊이 잠들어도 아이의 거친 숨소리를 내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다음날 다가 올 복잡한 내 동선과 집, 학교, 어린이집, 병원에서 보내야 할 초조하고 하릴없는 미안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면서, 출근하자마자 조퇴를 신청하면서, 남의 아이를 위해 수업하면서, 다시 아이를 데려오면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진료를 기다리면서 나는 누구에게 미안한지 잊을 정도로 수십 번 미안했다. 아픈 아이의 안부만 묻는 남편과 양가 부모님의 전화가 오면 나는 얼굴에 전기가 흐르고 팔다리에 힘이 빠져 말이 하기 싫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서 나는 드디어 휴직을 했다. 남편은 평소처럼 성실히 일했고 월급을 가져다주었다. 두 아이는 동시에 아프거나 번갈아 아팠다. 해야 할 밥과 빨래, 청소는 더 많아졌고 잠은 더 못 잤다. 그나마 유모차를 밀면서 걷기 운동을 했고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를 사 마셨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는 빵도 사 먹고 김밥이나 떡볶이도 끼니 삼아 사 먹었다. 남편에게 내 사진을 보내고 자랑삼아 떠드니 오늘도 회식이고 내일도 모임이 있다며 늦는다고 했다. 주말에는 아무래도 운동을 가야겠다고 말했다. 말하는 모양새가 이전보다 당당했다. 내 휴직 이후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거품처럼 말하다가 거품처럼 말이 사라졌다.
아무 말도 필요가 없는 순간도 있다. 말하는 순간 내 감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까 걱정하는 순간이다. 내가 가진 가난한 언어로는 차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냄새를 맡을 뿐이다. 영원처럼 기억하려 머리에 냄새를 기록할 뿐이다. 시각과 촉각을 곤두세우고 빨아들일 뿐이다.
거의 십 년 만에 갓난아기 안아 보았다. 젖비린내가 났다. 아기 엄마는 아직 붓기가 남아 있었다. 나에게 아기를 건네는 엄마의 얼굴에서 다수의 피곤과 약간의 행복이 보였다. 아기는 나를 보고 낯선 듯 눈을 찡그리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나는 용기 있게 아기를 내 왼쪽 어깨에 가만히 갖다 댔다. 솜털 같은 아기 머리칼과 두부 같은 두피에 나는 볼을 두세 번 비볐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나는 아기를 엄마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기를 보내고도 나는 계속 아기를 안고 있었다. 냄새를 맡고 있었다. 다시 아기를 안은 엄마의 노곤한 얼굴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교에 국화 화분이 여러 개 왔다. 국화는 1층 현관과 계단을 채우고 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나는 가을을 만난 문학소녀가 된다. 나는 교복을 입고 옆구리에 세계문학전집을 끼고 있다. 아까 읽은 시집의 시를 되 뇌이며 어울리는 선율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불러 본다. 그러다 국화 꽃잎-작지만 촘촘하게 붙어 있는 소박한 빛깔을 가만히 응시한다. 국화 꽃잎 같은 수많은 엄마와 아기를 떠올린다.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국화를 바라볼 뿐 그 순간은 시도 노래도 말도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