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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묵히다, 묵혀두다

by 물지우개

태풍이 몇 개 지나가더니 부쩍 바람이 차다. 행주 끄트머리가 대야에 걸쳐지면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물기처럼 가을은 여름의 끝을 어느새 타고 올라와 공기를 차게 물들인다. 급하게 추워지면 옷이 제일 문제다. 옷장은 아직 얇은 옷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숙제를 해결하듯 나는 아침도 먹지 않고 옷을 몽땅 꺼냈다. 냉정함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번 여름에 한 번도 입지 않은 옷, 자주 입고 빨아서 낡은 옷은 버리는 보자기로, 내년에도 입을 옷은 보관할 보자기로 구분했다. 옷이 두 보자기 중에 어디로 갈지 애매할 때는 더 냉정해져야 한다. 버릴 옷이 담긴 뚱뚱한 보자기는 현관으로 옮기고 보관할 보자기는 앉은뱅이 의자를 딛고 올라서서 옷장 제일 높은 곳에 얹었다. 그 리고 봄에 싸 둔 겨울 옷 보자기 내렸다.



분명 다시 입겠다고 싸 둔 보자기지만 풀면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입을 수 없거나 입을 자신이 없는 옷이 보인다. 나는 현관에 가서 버리는 보자기를 도로 가져왔다. 싸 둔 옷 중에서도 버릴 옷은 보자기로, 입을 옷은 서랍에 넣거나 옷걸이에 걸었다. 용적량을 분명 줄였는데도 옷이 두꺼워서 그런지 옷장이 두둑하다. 옷장이 따뜻하게 갈아입으니 숙제를 못해 불편하던 마음도 따뜻해진다. 나는 묵직한 보자기를 들고 1층에 있는 헌 옷 수거함으로 갔다. 초록색 구멍에 옷을 집어넣으며 나는 다시 냉정해졌다. 너와 나의 인연은 여기 까지라며 무심하게 옷을 보냈다.



다음은 선풍기다. 우리 집에 있는 선풍기를 모두 불러 세웠다. 키 큰 선풍기가 2대, 작은 선풍기가 2대다. 눈을 가까이 대지 않아도 망과 날개에 잔뜩 낀 회색 먼지가 보인다. 나는 드라이버를 가져와서 나사를 풀고 망과 날개를 떼어냈다. 욕조에 뜨거운 물과 세제를 담고 그 안에 망과 날개를 담그니 단단히 들러붙어 있던 먼지가 녹는다. 여름의 노곤함이 풀어질 때까지 잠시 두는 동안 나는 선풍기 버튼 사이에 끼인 얼룩과 먼지를 닦았다. 목이 덜렁거려 버려야 하나 고민하던 어느 선풍기는 아버지가 단단히 묶어 주셨다. 아버지가 묶어둔 틈새도 나는 꼼꼼히 닦았다. 마지막 찬물 샤워까지 마친 망과 날개를 다시 붙였다. 선풍기 전체에 비닐을 씌우고 창고 구석에 세우며 더워지면 다시 만나자고 인사를 했다.



여름옷과 선풍기를 잠시 묵혀두기로 한다. 냉정하고 꼼꼼한 이별의식이 끝난 후 보자기와 비닐로 봉해졌다. 다시 뜨겁게 접촉하기 위해 잠시 휴지기를 갖지만 옷과 선풍기는 쉬지 않는다. 반드시 돌아올 시간까지 드러내지 않고 기다리는 중이다.




아직 나는 친구의 연락을 기다린다. 친구에게 나는 아무래도 묵힌 사람이다. 스무 살부터 작년까지 오랜 시간을 만났지만 우리의 휴지기는 1년이 안 되었으니 나는 아직 덜 묵혀졌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별의식도 냉정하고 꼼꼼했다. 아예 연락을 하지 말자 했고 까닭도 나름 타당했다. 서로를 묵히기로 결정한 뒤로도 나는 나만 알 수 있을 정도로 질척거렸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하루 종일 생각하는 날이 더 많았다. 특히 8월은 힘들었다. 우리 둘 다 생일이 있었으니까. 자축하며 음식과 선물을 나누던 시간이 그리웠다. 나는 그만 묵혀지고 싶었고 친구를 그만 묵혀두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도 나만의 질척거림에 불과했다.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우리가 만난 시간만큼 지나면 우리의 휴지기도 끝나리라. 보자기와 비닐로 봉했듯 나는 아직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가 벗을 수도 없고 꺼내 달라고 외칠 수도 없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계절이 돌아오듯 하늘의 이치로 결국 우리도 만나게 되리라 믿는다. 그때까지 나는 곰삭을 뿐. 이별은 냉정하고 꼼꼼해도 만남은 힘을 줄 필요가 없다. 때가 되어 만났을 뿐이고, 만남과 동시에 이미 뜨겁게 접촉하고 있으니. 드러내지 않고 기다려야, 나를 충분히 묵혀야 만날 시간이 돌아온다.



선풍기와 여름옷이 나를 그리워하듯 오늘도 나는 짧게 혹은 길게 친구를 생각했다. 바람이 매섭게 차가워져 내 옷이 더 두꺼워져도 여름옷과 선풍기는 더 묵혀져 만남에 가까워지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와도 나는 절대 쓸쓸해하지 않겠다. 수만 번 그리워하고 수백 번 꿈에서 만나더라도 절대 드러내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나를 기꺼이 묵힐 것이다. 돌아온다고 믿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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