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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필요한 순간, 눈물로 충전해야 하는 시간

by 물지우개

살다 보면 슬픔이 간절한 날이 있다. 봇물 터지듯 울고 싶은 순간이 있다. 꾹꾹 참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실컷 웃고 나면 오는 쾌감처럼 실컷 울고 나서 맞이하는 후련함이 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펑펑 울어야 한다. 밀린 눈물을 쏟아내야 살아갈 힘이 난다. 그러나 나는 슬픔 버튼을 누르면 눈물이 바로 흐르는 기계가 아니다. 적당히 울 근거가 필요하다. 핑곗거리는 영화가 되기도 하고 그림이나 음악이 되기도 한다. 더 효과적인 버튼은 글쓰기다. 나는 종종 글을 쓰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잊었던 기억과 어린 시절이 글이 되는 순간 눈물은 첨부파일이다. 오롯이 슬픔이 되살아나 내 몸에 타고 흐른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생활고와 무지로 저지른 범죄 때문에 카리브해에 있는 감옥에서 2년간 갇힌 주부의 억울한 이야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아내보다 남편이 되었다. 아내를 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나만의 설정이었다.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를 무한대로 두들겨 맞기보다 타당하게 맞이하고 싶어서였다. 무능한 남편의 최후의 몸부림-감옥에서 아내를 꺼내 달라고 온몸에 신너를 붓고 불을 붙이는 장면에서 나는 슬픔의 구멍을 막기 위해 버티던 작은 손바닥의 힘을 놓아버렸다. 내 몸에 강한 기름 냄새가 나는 듯 울부짖었다.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슬픔을 토했다.



지금도 연락하는 중학교 동창이 있다. 가끔 안부를 묻고 만나는 친구다. 어릴 적 친구는 말을 다 하지 않아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공유한 우리만의 시간과 감정이 있기에 계산이 생각나지 않는다. 서툰 내 감정을 쏟아 낼 수 있고 친구의 감정도 내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을 보내고 사진도 보낸다. 어느 날 나는 친구에게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를 보냈다. 우울하던 중이었는데 내가 보낸 음악을 듣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눈물이 고팠냐 물으니 아무래도 그랬단다. 친구라 그런가 나와 통하는 데가 있다.



우리 반 아이 중에 자주 우는 아이가 있다. 내가 나무라면 물론이고 친구가 나무라도 바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다. 할 말을 다 못 해도 울고 문제를 풀다가 몰라도 운다. 그림이 잘 안 그려져도 울고 색종이가 잘 안 접어져 운다. 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는 것처럼 서럽게 계속 운다. 달래 보고 말려 보고 혼내봤지만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아 나는 요즘엔 그 아이의 눈물에 무신경하다. 그 아이를 관찰해보니 다른 아이보다 많이 우는 만큼 다른 아이보다 많이 웃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무표정한 아이보다 많이 울고 많이 웃는 아이가 사랑스러웠다. 아이 안에 있는 감정 버튼이 예민해서 좋았다. 너무 울어서 수업이 곤란할 때는 옆에 가서 살짝 말했다. “너는 우는 것도 예쁘지만 웃는 게 훨씬 예뻐.”



슬픔도 매일 충전해야 한다. 가끔은 눈물을 흘리는 초고속 슬픔 충전도 필요하다. 살아있다는 증거다. 사람답다는 증거다. 계절을 돌아 다시 불어오는 바람도 슬프고, 매일 마시는 커피도 슬프다. 오늘 휴일을 보내고 내일 아침 맞이할 출근이 슬프다. 눈물을 흘려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은 슬픈 음악은 필요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