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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Dec 10. 2024

내 아버지 이야기

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를 읽고

아버지는 어린 나를 보며 자주 말씀하셨다. 정아. 사는 게 죽는 거다. 니가 이렇게 말똥말똥 눈 뜨고 입은 쉬지 않고 오물거리니 나는 만날 죽고 싶어도 당최 죽을 수가 없다. 분명 딸을 앞에 두고 할 소리는 아니다. 그때 본 아버지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해 괴로운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내가 없으면 아버지가 죽고 싶지 않을 텐데, 내가 없으면 아버지가 편할 텐데, 내가 걸림돌이구나, 싶었으니까.     


일흔이 된 아버지는 그새 많이 변했다. 죽을병에 걸렸을까 봐 늘 걱정이다. 정아. 소화가 안 된다. 뭘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가 없다. 아무래도 암인 것 같다. 검사결과는 다음 주에 나온단다. 정아. 진짜 암이라고 하면 어쩌지. 정아, 나보고 죽는다고 하면 어쩌지? 아버지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시원하게 대답하고 싶었다. 아버지 옛날부터 죽고 싶었던 것 아니었어요.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죽음인가요. 제가 아버지라면 암이기를 바랄 것 같은데 방금 하신 말씀 진심인가요. 거짓이라면 언제, 어디부터였나요?  


        

신과도 같았던, 거스르기 힘든 자연의 힘 같았던 아버지가 이제 내 눈에 인간의 차원으로 추락했다. 앞으로는 세상에 대한 아버지의 말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리라. (p.113)     



죽음을 확인하고 싶던 아버지는 서울까지 가셨다. 조직검사를 해도 정상이라면 이 병은 양약으로는 틀려먹었다며 유명한 한방병원에 예약해 놓으셨단다. 온 가족 놀러 갈 때도 버거워하던 장거리 고속열차에 아버지는 기어이 몸을 실었다. 나는 내심 기대했다. 한의사는 아버지께 죽는다는 말을 할까.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심각한 상태라는 답을 듣고는 무려 백만 원이 넘는 한약을 지어왔다고 한다. 이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 말씀하시는 아버지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서운함이 느껴졌다.          


젊을 때는 죽고 싶으나 죽을 수 없었고, 늙어서는 죽고 싶지 않은데 죽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젊을 때는 자식 모르게 어디 가서 딱 죽고 싶었을 터이고, 늙어서는 자식들한테 짐이 될까 봐 결코 죽고 싶지 않은 아버지를, 어디서부터 거짓이고 어디까지 참인지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며, 죽음과 최대한 멀어지려고 발버둥 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간절히 살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화로 김장 김치를 가져가라 하셨다. 밀양에서 뽑은 배추를 창원까지 실어 나르느라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는 하소연도 덧붙였다. 아버지 이렇게 힘든 농사를 왜 하세요. 그러게 말이다, 내년부터는 안 할라고. 아버지, 그 말씀을 십 년 전부터 하신 거 아시죠. 허허허 내가 그랬나. 그래도 봄에 씨 뿌려서 싹 나고, 모종 심어 크는 거 보면 얼마나 재미난대. 그때는 고것들 보고 싶어 퇴근하면 매일같이 밀양에 갔다. 그러다 일이 많아지면 힘들고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만 든다. 그래서 봄에 또 하실 거예요? 내년에는 죽어도 안 한다. 진짜로.                


새로 나는 그 조그만 것들, 단단한 흙을 박차고 올라오는 그 푸르른 손짓을 아버지가 어찌 생각하는지 나는 안다. 사랑한다거나 좋다는 말로는 되려 옅어지는 그 귀함을 안다. 피곤으로 절절한 아버지 육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그 무게감을 안다. 그래서 죽음이 까마득한 그 어린 생명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도. 아버지는 젊을 때나 지금이나 사실 한치도 변하지 않았다. 쇳가루 날리며 퇴근한 지긋지긋한 어느 날, 까만 눈의 어린 딸이 아비를 향해 분주하게 뛰어올 때면 쇳덩이 깎으며 보낸 한탄의 하루가 얼마나 뿌듯했을지. 어린 생명이 당신을 빤히 바라볼 때면 종일 소진한 자신을 채울 수 있었을 터.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사는 게 죽는 거라고 한 말은 어쩌면 내일 죽을지언정 오늘은 살고 싶다는 뜻이리라. 늙은 아버지가 농사를 놓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이제 막 틔운 싹에서 아버지는 죽음과 멀어질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매일 죽고 싶다던 아버지는 사실 단 한순간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죽음이 흩뿌려진 구덩이에서 오로지 살아 오르고 싶을 뿐. 당신만을 향하던 그 풋풋함만이 죽음에 줄 선 아버지를 줄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직 살고 싶어서 그 어린것을 주시했다.          



인정하기 두렵고 창피한 일을 마주하는 어려움을 비춤으로써 서서히 더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이해에 도달하기를 꺼린다는 진실말이다. (p.57)     


김치통을 싣고 집에 가려니 아버지가 또 다른 상자를 내 차에 싣는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키위가 가득하다. 모양이 올망졸망 아기 주먹처럼 귀엽다. 물컹한 키위를 골라 깎으니 속이 노랗다. 나는 입안에 키위를 넣고 한참을 오물거려 본다. 달큼한 그것을 입에 넣자마자 아버지가 펼쳐진다. 나는 그 터를 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앞 고르지도 평평하지도 않은 땅이다. 그 밭의 흙은 나보다 더 아버지의 손발을 기억할 터. 덩굴이 더 넓게 퍼질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지주대를 세워야 했을지. 비탈진 땅이라 물을 대는 일도 힘들기에 물탱크를 늘 넉넉히 채우던 모습. 짐승이 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재차 점검하고, 수분 나무와 암수 나무를 구분하기 위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을 아버지. 혹 열매를 맺지 못할까 봐 직접 손으로 교배도 하셨겠지. 그렇게 키위를 키우며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죽다가 살았고 또 죽다가 살았다. 내가 머금은 키위는 죽음 문턱에 서성거리던 생명력 강한 아버지 삶이었다.          


어제는 알밤을 주워놨다고 와서 가져가라 하신다. 이번에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는 키위처럼 노란 소국을 사 갈 예정이다. 아버지는 꽃봉오리가 펼쳐지는 걸 보며 무심히 살고 싶다가, 꽃이 지면 다시 죽고 싶으실까. 아버지는 시든 국화를 분에서 꺼내 마당 한편에 심으실 것이 분명하다. 왜 이런 걸 사 와서 고생시키냐 투덜거리다가도 이듬해 봄, 연두에서 초록으로 잎이 무성해지면 다시 살고 싶으시겠지. 그러다 샛노란 소국이 아버지를 향하면 키위에서 아버지를 보듯 국화에서 어린 딸을 보시겠지. 늘 죽고 싶고, 간절히 살고 싶은 아버지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걸림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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