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래 가사처럼 가르친다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걸까? 배운다는 것은 꿈을 꾸는 걸까? 매일 가르치러 출근하는 나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을까? 우리반 아이들은 나에게 배우면서 어떤 꿈을 꿀까? 아니, 꿈을 꾸고 있을까? 좀 더 오래전으로 가서 나는 꿈을 꾸면서 배웠을까? 배우면서 현실을 잊는 꿈을 꾸었을까? 나를 가르친 선생님은 어떤 희망을 노래 하셨을까? 정말 희망을 노래 하셨을까?
학교에서는 꽤 오랜 시간동안 가르치고 배운다. 내가 지금 담임하는 1학년도 4~5교시 수업을 하니 시간으로 치면 순수하게 160분에서 200분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셈이다. 이 긴 시간동안 어린이들은 어느 정도 배웠을까, 진정으로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이 긴 시간동안 얼마나 가르쳤을까? 진심으로 가르친 건 어느 정도일까?
현 베트남 축구 지도자, 박항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히딩크 감독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팀의 코치로 있으면서 그로부터 큰 배움을 고백했다. ‘좋은 선수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지도자라면 부족한 선수를 훌륭한 선수로 육성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그런 가르침은 전혀 없었단다. 이미 만들어진 선수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기만 했을 뿐. 히딩크 감독의 선수 양성은 선수기용 능력이었다. 박항서 감독은 지도자로서 제대로 배웠다고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중학교와 완전히 다른 현실과 중하위권의 내 성적을 객관적으로 인정했고 심하게 절망했다. 절망의 정도가 너무 깊으면 탈출 에너지가 전혀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해봐야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나는 공부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3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내 삶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 때 잠시 상담한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차피 네 성적으로는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너도 공부에 큰 기대 말고 몸 건강하게 밥 잘 먹고 즐겁게 학교 다녀라.”
이 말씀으로 나는 성적 비관 정복 에너지를 완벽히 충전했다. 성적에 대한 엄마와 내 기대가 아니라 선생님의 기대를 뒤엎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봐도 탈출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께 제대로 배운 셈이다. 그때는 아팠지만 내 평생 가장 감사한 가르침이다.
박항서 감독과 내 배움의 과정을 반추해보면 배움이 가르침의 의도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을 바꿀 혁명적인 배움은 가르침의 의도와 정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배움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르친다는 것은 안내하는 것이다. 즉 가이드일 뿐이다. 교사가 안내하는 곳으로 갈지 안갈지는 철저히 학생에게 달려있다. 설령 다른 길로 가더라도 교사의 안내는 의미있다. 교사가 A를 안내했기 때문에 학생은 B를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배운다는 것은 안내받은 내용 중 알맞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변형하여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다. 좀 과장하면 학생이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교사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가르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내받은 내용을 철저히 선택하고 다시 변형하여 가르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배운 많은 교수법과 교사용 지도서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가르치는지 혹은 배우는지는 절대 공적으로 표준화할 수 없는 철저히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가르치는 것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은 꿈을 꾼다고 한다. 가르침과 배움 모두 철저히 개인적이고 서로 동떨어져 있어 보이지만 상생의 성장이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일이 어디 한두가지랴. 배움의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바꿔말하면 학생은 선생님을 가르치려 배운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우연적이고 운명적으로 서로를 키운다. 가르치며 배우고 배우다가 가르친다. 책과 학교 뿐만 아니라 곳곳에 가르침과 배움의 바퀴는 같이 굴러가고 있다.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지만 그 불확실성때문에 희망적이고 꿈을 꿀 수 있다.
내가 선택하고 변형한 사적인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길 안내로서 의미있길 기도한다. 학생이 내 안내와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가르침이 의미있다고 나 자신을 다독이길 바란다. 나는 다른 길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다시 배울 것이다. 학생들에게 배운 내용을 다시 선택하고 변형하여 가르칠 것이다. 나는 희망의 아이들이 노래하는 꿈을 꾸는 선생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