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날, 마음 팩트 체크

여행을 사랑하세요?

by 물지우개


즐긴 여행이 언제였더라? 나는 분명 여행을 좋아한다. 이건 팩트다. 그런데 ‘즐겼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여행은 왜 떠오르지 않는지?

다시,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상상하면 설렌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검색할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거다!라는 판단이 서면 결제를 누르는 손가락은 빠르고 담담하다. 그다음은? 그래, 그다음이 문제다.



여행이 다가올수록 설렘은 낮아지고 불안이 올라간다. 날씨, 준비물, 여행가방, 아이들 컨디션, 남편과 사이 유지 등 많은 숙제가 한꺼번에 떠오른다. 망치로 쾅! 두드려 숙제를 집어넣어도 여기저기서 두더지처럼 뿅뿅! 솟아오른다. 결제할 때까지는 분명 즐겼는데 여기서부터 갑갑하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그때부터 나는 봉사위원이 된다. 아무도 뽑지 않은 자발적 봉사위원. 그러나 스스로는 희생양이라는 생각. 책임감과 멀리 떨어지고 싶은 이 ‘인성’이 책임을 아주 많이 지는 만능 정보 검색 및 결정권자가 되는. 찾아낸 정보는 성실함만으로는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 신의 영역. 이러니 더욱 즐길 수 없다.

거기다 돈. 돈도 한 몫한다. 뭘 하든 계산기를 두드린다. 여행은 돈 쓰러 간다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돈 쓰는 게 불편한 사람. 비행기표와 숙소비처럼 큰돈은 오히려 담담한데 먹거리나 입장료는 왜 이렇게 비싼지. 담담한 척 계산해도 가족들 눈치는 왜 보는지.

상황이 이 지경이니 내 준비물 1번은 두통약이고, 고객님 하교 후 믹스커피 마시듯 두통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두통약은 더 절실해지는데 어긋나 버린 일정도 그렇지만 제시간에 집에 못 갈까 봐 불안해진다. 결항이라면 완전 낭패(보홀에서 비바람으로 하루 못 나온 적이 있었는데 숙소와 비행 문제로 수명이 타들어갔다).

맛있게 먹어도 맛있지 않고, 재밌는 구경도 재미있지 않다. 잠을 자도 잠들지 못하니 약은 내가 제일 많이 먹는 듯. 큰 탈없이 여행이 끝나도 나는 해방을 맞지 못하고 밀린 빨래와 짐 정리라는 육체적 노동 시장에 내던져진다. 사랑하는 내 식물이 아사상태라면 정신적 피로마저 최고. 여행의 피날레는 몸살이었고 완주 후 기념품은 억울함이었다.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을 여행이어도 첫 출산의 고통을 잊듯 다음 여행을 기대한다. 바닥났던 설렘 지수는 가속도가 붙는다. 여행이 나를 배신해도 나는 여행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열병을 앓고 기운을 차리면 비행기표부터 찾는다. 돈 버는 일도 견딜 수 있다.

나는 여행을 사랑하지만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여행의 사랑을 얻는데 실패해도 나는 구애를 멈추지 않는다. 내 사랑은 여전하다. 지금부터 짐을 챙긴다. 마음은 팩트 체크를 마쳤다.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 마음을 잊지 않겠다. 가족을 챙기고, 돈을 쓰고, 검색하고, 결정하고, 책임감에 무거워져도 널 사랑한다는 증거를 곳곳에서 찾아보리라. 결국 너도 나를 사랑하게 하리라.



나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이다.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
나는 여행을 사랑한다.

여행을 향한 내 마음은 직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