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금모래 해변에서 착해지다

모래 좋아하세요? 좋아하긴 했었나요?

by 물지우개


“선생님, 우리 **이 보고 운동장에서 모래 만지지 말라고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1학년 담임일 때 학부모님께 한 번 이상은 듣는 이야기다. 아이는 좋아하고 엄마는 극도로 싫어하는 놀잇감 중에 모래는 빠지지 않는다. 고학년이 되면 어린이 스스로 하지 않는 모래놀이. 바다에서 놀고 싶어도 모래가 싫어서 해수욕장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모래는 분명 ‘비호감’이다. 뜯어말릴 정도로 좋아할 때는 언제고 나이 들수록 모래를 싫어하니 모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신발에 모래가 한번 들어가면 여러 번 털어 없애도 스멀스멀 나타난다. 호주머니도 마찬가지. 뒤집어서 털고 세탁해도 개면 후드득 떨어진다. 제일 골치 아픈 건 머리카락이다. 머리에 모래를 한번 뒤집어쓰고 나면 샴푸를 여러 번 해도 며칠간은 두피에서 모래 알갱이가 느껴진다. 습한 날이나 바닷가에서 모래로 놀고 나면 피부에 풀칠한 듯 모래가 들러붙어 있다. 손으로 털어도 안 떨어지고 물로 잘 씻기지도 않는다. 여러 번의 비누칠이 필요하다. 이처럼 한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으니 모래는 사람을 좋아한다.

배신감에 억울해하면서도 순애보를 가진 모래를 나는(아니, 나도) 싫어한다. 어린이 입장에서 모래를 허용하려고 해도 모래는 엄마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때문이다.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모래는 사람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람은 모래를 좋아할 수 없다. 나한테서 떨어지라고 할 때 처음부터 깔끔하게 떨어졌으면 ‘혐오’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어쩌면 사람이 모래를 배신한 게 아니라 모래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도 모른다.

집착이라 치부해도 모래는 사랑의 농도를 조절할 능력이 없다. ‘밀당’ 같은 건 아예 들어본 적도 없다. 모래에게 사람은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기 때문이다. 모래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래는 오직 사람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바위일 때부터 모래가 될 때까지 그 억겁의 시간 동안 말없이 단련을 견딘 건 오직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바람에 몸이 갈라지고 흐르는 물에 깎이고 또 먼 길을 달리며 수백만 번을 부서져도 누구에게 붙은 적 없다. 누군가를 사랑한 적 없다. 모래는 고통만 받았을 뿐 사랑받은 적 없다.

몸이 갈갈이 찢어져 이젠 끝이구나 싶을 때 비로소 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온몸으로 모래를 사랑해 주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듯 보드라운 피부를 갖다 댔으니.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를 하는 동안 모래는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끝도 없이 모래를 두드려 주었으니까. 소꿉놀이를 하면 모래는 황홀했다. 그릇에 소담히 담긴 밥이 되면 아이는 행복한 얼굴로 모래를 바라보았다. 모래성을 쌓으면 모래는 귀한 몸이 되고 아이는 세심하게 어루만졌다. 아이가 맨발로 걸으며 발가락 사이가 간지럽다며 까르르 웃을 때 모래는 정말 행복했다.

더는 부서질 몸도 없고 더 가봐야 잠식뿐인 벼랑 끝에서 모래는 아이와 사랑할 수 있어 좋았다. 아이와 더 오랫동안 사랑하고 싶었다. 고운 피부를 느끼고 싶었다. 모래는 집착 말고는 사랑을 지키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오랜만에 모래를 만졌다. ‘화순금모래’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모래를 만났다. 처음 봤을 때는 모래가 거무튀튀하다 생각했다. 그럼에도 손으로 한 움큼 쥐어 손바닥 위에 천천히 펼치니 햇빛에 반짝거리는 무수히 많은 모래 알갱이가 보였다. 생각해보니 화산 바위에서 출발했고 땅 밑의 용천수를 충분히 머금어 검게 보이리라. 화순금모래는 억겁의 시간이 흘러도 역사를 잊지 않았고 무거워지더라도 지나가는 물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그 과정에 반짝이는 사리 가루까지 만들었으니 나는 오늘은 모래를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모래에 무심했을 뿐만 아니라 공격마저 서슴지 않던 나이 든 내가 화순금모래를 보니 착해졌다.

나는 모래찜질을 했다. 턱 밑까지 모래로 덮어달라고 했다. 딸은 신나서 모래에 나를 묻었다. 딸과 두껍이 집도 지었다. 모래가 내 몸에 얼마든지 묻어도 상관없었다. 옷에, 머리카락에, 신발에 속속 파고 들어가도 괜찮았다. 그동안 잘못을 면죄받는 자리라 나는 온순해야 하니까. 샤워할 때 보니 모래가 많이 묻었다. 몸 구석구석 파고든 모래는 역시 쉽게 털리지 않았다. 아이가 늙어 모습이 변해도 변치 않는 사랑을 보내준 모래다. 딸과 내 몸의 모래를 터는데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손으로 모래가 붙은 피부를 쓰다듬으며 잘 가라고 보내줄 뿐이었다.

한참 지나도 귀에 모래가 만져진다. 이때 ‘역시 모래는 안돼.’라는 낙인은 너무 가혹하다. 내 사랑이 또 변해 모래를 서운하게 할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변치 않는 사랑의 모래를 혐오하지는 않겠다. 모래가 아이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도 아이를 야단치거나 노동을 착취한다는 뾰족한 말은 쓰지 않겠다. 집착하는 모래로 화가 날 때는 모래가 견딘 시간을 떠올리며 이해해 보겠다. 그리고 가끔은 오늘처럼 모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겠다.


그리고, 나는
모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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