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을 열어 제주의 바람을 쐰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바람이 어찌나 세던지 그 소리에 잠을 설쳤다. 날이 새도 바람은 여전하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니 잎은 춤을 춘다. 무릎쯤 키가 자란 콩잎은 물결처럼 출렁인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콩잎은 잎 끝으로 초록을 뿜어내 바람에게 돌려준다. 다시 부는 바람에는 초록 냄새가 난다. 2.
초원에서 말을 본다. 미인 대회하듯 말은 저마다 매끈한 몸매를 자랑한다. 풀을 먹는 말은 결코 달리지 않는다. 가만히 서 있거나 한 두 걸음쯤 바람 따라 움직일 뿐이다. 초원의 말은 경쟁을 모른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풀이 움직이면 풀 따라 걸을 뿐이다. 그 매끈한 몸은 초원과 다르지만 가만히 쳐다보면 말은 초록이다. 말은 바람과 풀의 말을 거스르지 않는다. 온순한 초록으로 자란다.
3.
곶자왈에서 제주의 돌을 보았다. 숲의 시작은 화산재인 현무암이다. 현무암은 가벼워도 가난하지 않다. 마음껏 물을 품는 넉넉함을 지녔다. 그 물을 먹고 이끼가 자란다. 이끼가 번지니 검은 돌은 초록이 된다. 이끼로 덮인 돌들 사이로 종가시나무 뿌리가 자란다. 한 뿌리에서 시작해도 종가시나무는 결국 열 그루다. 종가시나무 아래에는‘가는 쇠고사리’ 군락을 이룬다. 제주의 돌은 검지만 검지 않다. 푸르디푸른 곶자왈, 초록의 시작이다.
4.
돌이 키운 곶자왈의 나무는 밑동이 초록이다. 크든 작든 나무줄기는 콩짜개덩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콩짜개덩굴 잎은 나무 밑동에 초록 물감을 붓끝에 묻혀 점을 찍었다. 여린 콩을 반쪽 낸 듯한 잎은 나무에게 초록 옷이 된다. 나무가 좋아하든 말든 콩짜개덩굴은 위로 위로 계속 점을 찍는다. 사실 나무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나무는 태어날 때부터 덩굴의초록 비늘이 자기 옷인 줄 안다.
5.
곶자왈의 개가시 나무는 멸종위기 야생식물이다. 종가시나무처럼 도토리를 맺지만 번식력이 미미하기 때문이다. 키가 큰 개가시나무의 줄기는 누더기 모양의 나무껍질을 덕지덕지 붙이고 있다. 껍질 조각은 딱딱하고 모가 나고 바스러진다. 언제부터인가 개가시나무는 습기를 머금지 못했다. 습기가 없으니 양치식물에게 곁을 내줄 수도 없다. 곁을 내주지 못하는 개가시나무는 외롭다. 벌목으로 개가시나무는 점점 불임의 몸이 된다. 개가시나무는 인간이 자기를 모르던 때, 누더기마저도 초록일 때가 그립다.
6.
제주사람의 제주 말씨를 듣고 있으면 말이 동글동글 굴러가는 듯하다. 경상도 말씨가 뾰족한 탱자나무라면 제주 말씨는 청미래덩굴이다(청미래덩굴을 경상도 사람은 망개나무라고 한다). 제주 말씨에는 외지인을 경계하는 듯 이질적이지만 진심을 전하는 초록이 있다.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도 제주 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진심이 담기기 때문이다. 망개나무잎으로 떡을 싸면 떡에 초록 향이 베고, 여름에도 떡이 상하지 않는다. 망개 나뭇잎 같은 동글동글한 제주 말씨는 깊숙한 곳에 변하지 않는 진심을 숨긴 초록 색 언어다.
7.
제주에 사는 섬휘파람새는 육지의 휘파람새보다 마음이 바쁘다. 숲에 친구가 많은 만큼 경쟁자도 많다. 마음이 급한 섬휘파람새 수컷은 육지의 그것보다 채도가 높은 초록 알파음을 낸다. 벗이자 경쟁자보다 더 맑은 초록 알파음을 내어야 예쁜 암컷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섬휘파람새가 내는 조금씩 다른‘휘-익’ 소리는 묘하게 어울려 화음이 된다. 암컷은 더 맑은 초록 소리를 고르느라 정신이 없다. 제주 텃새 섬휘파람새는 제주 사람처럼 초록의 제주 소리를 낸다.
8.
육지의 참나무는 가을이 되면 갈색 잎을 우수수 떨어뜨리지만 비슷한 열매를 가진 제주의 종가시나무는 지금 상록수다. 이끼와 양치식물을 키우는 종가시나무는 아홉 달 씩이나 잎이 초록이다. 사실 선생은 학생에게 배운다. 엄마는 아이가 키운다. 수많은 식물의 터전인 종가시나무는 결국 자신도 상록수가 되었다. 초록에게 초록을 배우고, 초록으로 키워진 나무는 아홉 달을 푸르게 살다 져도 본성을 잃지 않는다. 오랜 기간 늘 푸른 숲이 된다.
9.
초록의 현무암과 나무 밑동, 수많은 양치식물과 상록수 잎은 제주 사람을 숲답게 키웠다. 제주의 숲은 위험할 때 제주 사람을 숨겨주기도 했다. 사람은 숲이 허락한 동굴에서 그저 숨기만 한 게 아니라 숲의 도움으로 공격할 준비도 할 수 있었다. 설령 인간이 나무를 베어도 맹아를 자라게 하는 모성으로 사람을 지켰다. 사람을 지킨 숲은 이제 푸르른 제주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