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결정권자’라는 권력을 내려놓았다. 어디서 뭘 하자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내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으면 ‘엄마는 여기에 가고 싶다’라고 의견을 냈고 동의를 구했다. 아이들에게는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제주여행책이나 스마트폰으로 직접 찾아보라고 했다. 남편 역시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수영을 하자’ 라던가 ‘밥 먹으러 가자’라고 큰 아우트라인을 먼저 말하면 나는 그 안에서 몇 가지 안을 제시했다.
두 번째로 가족들 마음보다 내 마음에 집중했다. 아이들이 재미있어하는지, 남편이 피곤해하는지 눈치 보지 않았다. 가족들의 재미나 지루함, 피곤함도 내 통제 영역이 아니라 백 프로 그들의 몫이기에 나는 개의치 않았다. 대신 내 마음은 어떤지-즐거운지, 졸린지, 흥분되는지 내 안의 소리에 집중했다. 덕분에 매일 글을 쓸 수 있었다.
세 번째, 돈을 쓰는 일이 불편하지 않았다. 여수에서 배를 탔고, 우리 차를 가져갔으며,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구했기에 비행기, 렌터카, 호텔을 이용했을 때보다 출발 전부터 절반 이상 비용을 줄였다. 대신 6박 8일 동안 마음껏 먹었고 관광지 이용료나 입장료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신용카드보다 현금을 낼 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현금은 지갑만 열어도 바로 계산이 되니 불편하지 않았다. 인위적인 관광지보다 제주의 자연을 느끼는 관광지에 우리는 더 만족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연을 느끼는 관광지-해수욕장, 계곡, 오름, 숲, 온천은 당연히 입장료가 없거나 저렴했다.
네 번째, 아이들의 세 끼를 챙기지 않았다. 밤 8시에 하는 관악제 공연을 보고 숙소로 돌아오면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잠을 잤다. 당연히 아침에도 늦게 일어났다. 고백하자면 나는 ‘아침밥 강박증‘이 있다. 아이들 아침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기는 엄마다. 그러나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군것질도 자주 했다. 그래서 하루에 두 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거르고 싶을 때는 과감히 패스했다. 그래도 총칼로리로 보면 평소보다 많이 먹은 것 같다. 지금 바지가 낀다.
다섯째, 날씨가 좋지 않거나 피곤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이 아니라 숙소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뜻이다. 성실한(?) 나는 여행에서 가능한 한 많은 일정을 소화하는 사람이었다. 날씨가 안 좋으면 그런 날을 선택한 나를 자책했고, 자책을 무마하기 위해 궂은날에도 굳이 일정을 찾아 나섰다. 몸 컨디션도 마찬가지. 진통제를 먹어가며 여행을 견뎠다. 이번 여행은 출발할 때도 태풍이 왔고, 여행 중일 때도 태풍이 지나가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 절반이었다. 아이들은 숙소에서 보드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봤고, 남편은 쓰던 논문을 썼다.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그나마 한 일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서 밥을 해 먹었다. 그래도 하루도 밖에 나가지 않은 날은 없었다. 감사하게도 제주국제관악제와 여행기간이 딱 맞아져 하루에 한 번은 공연을 보러 문예회관이나 서귀포 예술의 전당에 갔다. 아! 아이들이 공연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숙소에서 쉬게 했다. 남편과 나도 몸이 피곤할 때는 낮이라도 숙소로 돌아와 잤다.
그래도 제주로 가는 배가 심하게 출렁거릴 때는 배를 선택한 내가 한심했다. 여행지에서 아이들이 사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거의 사주지 않았다. 먹고 싶어도 너무 비싸 보이는 식당이나 카페는 가지 않았다. (예전의 나에 비하면 바닷물이나 계곡물에 오래 논 편이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물속에서 같이 놀지 않았다. 에어비앤비의 숙소는 두 곳 다 사진과 달랐다. 벌레가 많았고 찾기 힘들었다. 아이들이 싸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는 나도 남편도 소리를 질렀다. 4명이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제일 아쉬운 점, 빵지 순례가 단 한 번 뿐이었다.
여행을 사랑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즐겼어?’라고 묻는다면 ‘즐겼지!’라고 말하기 아직은 부족하다. 그나마 발전한 점은 욕심을 내려놓았고, 돈과 책임감에서 조금 자유로워졌으며,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에 집중했다는 점이다. 아, 가장 잘한 일은 매일 글을 쓴 일이다. 돌아가는 배에서도 일몰을 보며 글을 쓰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마 나는 바로 잠들지 못하고 다시 짐 정리를 혼자 하겠지. 여행가방을 열어 빨랫감과 옷을 정리하고, 물건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느라 꽤 시간이 걸릴지도. 남편은 내일 아침에 하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게 불편한 사람이라 정리를 해야 편히 잠 들리라. 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의식을 경건하게 치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