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포 투'를 읽고
책은 작가의 첫 단편집으로, 뉴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6개의 이야기와 데뷔작인 ‘우아한 연인’의 등장인물인 이블린 로스의 스핀오프 격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7개의 단편을 묶으며 작가는 ‘Table for two’라는 제목을 붙였고 제목에 대한 설명은 마지막 작가의 말에 아래와 같이 남겼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다 모은 뒤, 대부분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족이나 낯선 사람 두 명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서 자기 삶에 나타난 새로운 사실과 직면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이 작품들을 쓸 때는 그 점을 의식하지 못했으나, 틀림없이 2인용 테이블에서 나눈 단 한 번의 대화로 인생이 크게 변할 때가 많다는 제 잠재의식 속 확신이 낳은 결과일 겁니다. (p.591)
우리는 보통 삶을 뒤바꾸는 계기를 역사적이거나 환경적인,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불가항력의 사건에서 찾는다. 범 지구적인 흐름에 압도당하는 변화 정도라야 자신의 인생도 변할 수 있다고 여긴다. 정말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변화는 생각과 관점의 변화에서 온다. 그 변화는 작은 일상의 깨달음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깨달음과 통찰의 순간을 두 사람의 내밀한 대화에서 찾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책을 읽어보니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다르게 다가온다.
재미있는 건 대화로 변화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첫 번째 단편인 ‘줄 서기’의 두 부부는 대화를 하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는 않는다. ‘아스타 루에고’의 스미스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지만 중독자의 특성상 변화를 일으키는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밀조업자’의 토미는 능력 있고 성공한 좋은 사람이지만 주변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못한다. 입 밖으로 말한다고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로 함께 말을 한다고 듣는 것은 아니고 상대의 말을 새기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 생각이 정리되고 변화가 생길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상대에게 이야기를 하는 자체가 변화의 시작이지 않을까.
앞서 작가의 저서 3권을 모두 읽었기 때문인지 이 책이 더 즐거웠던 이유는 자신의 책을 사랑한 팬들을 위해 준비한 종합선물세트의 느낌이 나서였다. ‘모스크바의 신사’로 익숙한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첫 단편을 시작으로, 작가의 작품에 익숙하게 등장하는 음악과 예술의 모티브들이 가득한 단편들이 연이어 지적 즐거움을 끊임없이 퍼부어주고, ‘우아한 여인’의 너무나 매력적인 캐릭터인 이블린의 이후를 다룬 마지막 이야기까지. 팬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사랑하는 것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맞지? 고마워요,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에이모 토울스의 소설에는 유독 책과 음악, 미술이 자주 등장한다. 심지어 두 번째 이야기인 ‘티모스 투쳇의 발라드’에서는 뉴욕의 작가인 폴 오스터가 직접 등판한다. ‘밀조업자’를 읽으면서는 카네기 홀에서 음악을 듣는 듯 현장감에 클래식 선율이 들려오는 듯하다. ‘디도메니코 조각’은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거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생생하고 보이지 않는 그림이 잡힐 듯하다. 설명이나 묘사가 자세하고 풍성해 읽는 내내 즐겁다. 이전 소설에서도 이런 소재는 굉장히 자주 등장했다. 이에 대해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내 소설에서 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소설 속 음악, 그림, 영화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통해 예술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창문 같은 기능을 하는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어느 순간의 사회적 상황, 자신의 개성과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매우 특별한 시간과 공간에 놓여 있다. 주인공이 이 맥락에서 관찰하는 예술 작품은 그와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 자신의 세계와 조화되거나 대립하는 다른 세상에 대한 창(窓)을 제공한다. (출처 : 채널예스)
에이모 토울스라는 창을 통해 본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의 삶이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너무나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그날 밤 푸시킨이 집으로 돌아와 이리나에게 사정을 설명했을 때, 이리나는 침착하게 생각해 보았다. 공산주의가 모두에게 똑같은 삶을 보장한다는 것은 흔한 오해였다. 어쨌든 그녀의 생각은 그런 방향으로 흘렀다. 공산주의가 실제로 보장해 주는 것은, 혈통과 행운 대신 국가가 나서서 공익을 꼼꼼히 따져본 뒤 누구에게 무엇이 돌아갈지 결정한다는 점이었다. 이 간단한 원칙에 따라, 많은 국민의 공익을 위해 남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는 동무가 더 많은 자원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논리적인 결과였다. 《프라우다》의 편집자이자 농민의 투사이며, 메트로폴 호텔 방 네 개짜리 스위트 룸에 살고 있는 니콜라이 부하린에게 한번 물어보라!
반박할 수 없는 이 논리를 통해, 이리나는 자신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진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푸시킨을 남편 동무로 부를 때가 많았다. p.33
한 팔로 머리를 받친 채 미소를 지은 그녀는 카메라를 등지고 앉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턱시도를 입고, 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손이 닿는 곳에 담배 한 개비를 둔 남자였다.
평생 처음으로 부러움이 푸시킨의 가슴을 찔렀다. 부러운 것은 이 젊은 커플의 부유함이 아니었다. 뉴욕이라는 전설적인 도시에 있는 것 같은 이 우아한 테라스에서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매력적이고 평온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 함께 있는 남자를 향해 보여주는 미소가 부러웠다. 푸시킨은 평생을 통 들어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 는 일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p.35
소련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는 푸시킨은 자신의 답변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일지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질문이 과 거의 따뜻한 일을 되새겨보라는 초청장처럼 보였다. 고골리츠키 마을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그는 형에게서 덫으로 토끼 잡는 법을 배웠고, 어머니는 빨래를 널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반가운 질문은 직업 경험에 관한 것이었다. 푸시킨은 자신과 이리나가 어떻게 땅을 갈아 작물을 수확했는지 설명했다. 어스름한 연보라색 빛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면 양배추 수프가 작은 식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썼다.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이었는지!
사실 푸시킨이 말하고 싶은 추억이 너무 많아서 글자가 여백을 채우다 못해 뒷장으로까지 넘어갔다. 마침내 마지막 질문(왜 소련을 떠나려 하는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럴 생각 없음. p.42
하지만 그렇게 변신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이리나의 마음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연민을 담아 외쳤다. '사람은 변할 능력이 있는 것 아니야?' 이리나는 남편에게 소리치는 것으로 이 질문의 답을 대신했다. "물고기가 새가 될 리가 없지."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터미널 밖으로 나갔다.
"거북이가 코끼리가 되겠어?" 그녀가 초자연적인 속도로 부두를 따라 걸으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비한테 수염이 생기겠어?" 이렇게 동물에 빗대서 상식을 말하는 데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녀는 주위 풍경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고가철도 아래를 지나 로어웨스트사이드의 거친 동네에 들어섰다. p.52
그러니 지금껏 경험한 가장 불편한 일이라고 해봤자 봄에 잔디를 깎은 일, 가을에 낙엽을 갈퀴로 긁어모은 일, 겨울에 눈을 치운 일 뿐인 사람이 어떻게 우아하고 의미 있는 소설을 써낼 수 있겠는가? 티모시의 부모는 왜 하다못해 알코올중독에 무릎을 꿇거나 이혼소송을 제기하는 일조차 하지 않았단 말인가.
신들이 젊은이에게 문학적 명성을 얻겠다는 꿈을 불어넣고서 경험을 전혀 제공해주지 않다니, 이보다 더 잔인한 아이러니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티모시가 자신을 포함해 서 모두에게 숨긴 비밀이었다. 그래서 매일 오전 10시에 그는 도서 관으로 가서 작가들의 버릇을 공부하며 소설 집필을 뒤로 미뤘다. p.61
세상이 장원과 오두막으로 나눠져 있던 시대는 이미 먼 과거가 되었다. 대신 우리 시대에는 먹을 것, 입을 것, 거할 곳이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팔자를 고치려면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거나 철도사업에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반면, 지금은 일주일에 추가 수입이 50달러만 생겨도 사다리를 한 단 더 올라가 조금 더 맛있는 수프, 조금 더 세련된 셔츠, 자연광을 조금 더 받는 거 실을 누릴 수 있다.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만으로 정말 차이를 느낄 수 있나요? 그것만으로 단 1분이라도 젊은이를 더 행복하게 만들고, 그의 자아에 힘을 주고, 시기심이라는 거슬리는 목소리를 막아버릴 수 있나요?" 갈림길에서 젊은 이에게 일주일에 50달러를 추가로 벌게 해 줄 테니 꿈을 조금 조정해 보라고 말한다면 그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만 말해 두겠다. p.73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다. 커다란 결점도 있고 작은 설도 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결점도 있고, 끈질기게 남는 결점도 있다.
나는 생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상대가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사람인데도 처음 만났을 때는 따뜻하게 대하지 못할 때도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불편한 일이 생기면, 그 불편을 초래한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는 유혹에 저항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급한 일보다는 내게 시급한 일을 더 우선시하는 경향도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특히 그런 사람들에게 더 그런 성향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고객서비스 창구 앞에 줄을 서서 방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게 아무리 많은 결점이 있어도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그때가 되면, 제니퍼가 남편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 듯이 내 아내도 나를 위해 기꺼이 나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니, 그냥 바라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기원하고 있었다.
내 아내, 그녀의 이름은 엘렌이다. p.114
그녀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 페기는 정말로 배신감을 느꼈다.
남편의 부정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젊은 시절의 암묵적인 약속에 대해서도 배신감을 느꼈다. 스미스 칼리지, 감독파 교회, 제인 오스틴 등에도 배신감을 느꼈다. 그들 각자가 결혼의 신성함을 찬양했으니까. 해리 편을 들거나 외교적인 표현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옛 친구들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던 사람들이 이제 식탁에서 짝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전에 비해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빈도가 줄어든 것에도 배신감을 느꼈다. 궁극적으로는 인생에 배신감을 느꼈다. 그 추문, 고독, 결혼 생활이 무너지는 굴욕을 감내해야 한다고 그녀에게 강요했으니까.
그녀보다 자격이 없는 주변 여자들조차 흠 없는 결혼생활이 보장해 주는 도덕적 우월감을 발산했다. 이렇게 전면적인 배신감 때문에 페기는 분하고 화가 났다. p.153
어린이용 이야기책에 나오는 그 옷장과 조금 비슷하다. 용감한 소녀가 외투 사이를 지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도착하는 이야기 말이다. 조금 전까지 나는 카네기홀에서 소나타를 듣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한 숲 속을 방황하고 있다. 그 라다 소나무에 에워싸인 작은 공터에 다다르면, 가로등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이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눈 내리는 숲 한복판에 가로등이 왜 있어?'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가로등이 그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가로등에는 왠지 아주 정답고 매력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장소가 어디든 가로등이 나타나면 반갑다. p.203
토미는 양복을 옷걸이에 걸고, 이를 닦고, 침대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1분쯤 책을 읽는 시늉을 하다가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 신발을 정리했다. 토미가 다시 베개를 베고 누운 뒤 나는 몸을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때로는 우리에게 그런 것이 필요하다.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라 해도 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달래듯이 누군가가 머리에 쪽 입을 맞춰주는 것. 내가 최소한 그 정도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10분 뒤면 나는 곤히 잠들겠지만, 토미에게는 아주, 아주 긴 밤이 될 테니까. p.217
어떤 사람들은 얄궂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주는 딱히 얄궂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얄궂은 것과는 정반대다. 저주에 담긴 내용이 그대로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실현되기를. p.236
마지막에 한 말이 이브의 입에 시큼한 맛을 남겼다. 친구에게 이런 일을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게 마치 친구를 배신하는 짓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것이 여자들의 삶이었다. 여자들은 남에게 침범당하는 것을 견디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물론 리비는 오늘의 일을 결코 완전히 잊지 못할 터였다. 항상 머릿속에 있을 터였다. 그러나 한동안 이 일을 묻어두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평소의 모습을 조금이 나마 되찾아 나아갈 수 있을지도. p.416
한때는 관객의 갈채를 받고, 동료들이 우러러보고, 길에서 낯선 사람에게 이름이 불리는 생활을 했으니, 이렇게 명성이 이지러지는 것을 겪으며 어떻게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늘, 1939년 3월 19일, 베벌리힐스의 중심부에 있는 아시엔다에서 그는 하찮은 존재가 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일 것이다. 이 악당의 집에 다시 들어가, 화려한 사람들 사이를 뚫고 한 번 더 나아갈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허깨비처럼 행동한다는 점이 다를 뿐.
넌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야. 아시엔다 정문에 도착한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도 아니야!" p.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