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시대, 지배하지 않아도 녹아들어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by 고라니

우리가 떠올리는 역사는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의 연속이다. 특히 18세기와 19세기에 걸친 러시아 역사는 계보를 떠올리기도 혼란스러울만큼 사건들이 중첩되어 벌어지고 주체 또한 맥락없이 많아 몇번을 살펴보아도 머리 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 시절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소설이다. 그럼에도 어럽지 않다. 사람들을 통해 들어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그것도 한 장소에서 50여 년의 시간을 그려냈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소설은 중반 이후 그 재미를 더해 빠르게 전개되는 후반부의 시간이 주인공의 중노년의 빨리 흘러가는 시간과 중첩되어 몰입도를 높인다. 과연 명성에 걸맞게 재미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철학까지 무엇 하나 흘릴 수 없는 책이다.


특히 주인공인 백작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명물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아름답고 우아하다. 어떤 상황에서고 자신을 잃지 않는 그에게는 사람이 모이고 안타깝게 보이던 시간들은 긴 시간이 흘러 보면 누구보다 따스하고 행복한 시절로 기억된다. 그치지 않고 그는 미래를 만들어간다. 그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재를 보내야할지 관계와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나에게 중요한 것, 나를 살게 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스크바의 신사를 통해 만나본다.




참 이상한 일이야. 스위트룸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을 때 백작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나 가족과 헤어지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역에서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를 배웅한다. 사촌을 방문하고 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한 다. 결혼을 하고 외국 여행을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가까운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서 그가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고, 머잖아 그로부터 소식을 듣게 될 거리는 생각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작별을 고하는 법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물건과 작별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배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친구에 집착하는 것보다 더 극성스럽게 소중히 여기는 물건에 집착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꽤 많은 비용과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 물건들을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옮긴다. 표면의 먼지를 떨고 광을 내며, 가까이에서 너무 거칠게 노는 아이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 물건들에 계속해서 추억이 쌓여 점점 더 중요성을 띠게 되는 것을 허용한다. 우리는, 이 장식장은 우리가 어렸을 때 안으로 들어가 숨던 장식장이야,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우린 이 은색 촛대들을 탁자 위에 나란히 놓아두었지, 이게 바로 그녀가 한때 눈물을 닦던 그 손수건이야, 같은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정성껏 간수해온 이런 물건들이 친구나 동반자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물론, 물건은 물건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여동생의 가위를 호주머니에 넣은 다음 남아 있는 가문의 가보에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나서 그것들을 자신의 아픈 마음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p.30



어찌 됐든 인생은 유혹할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백작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지 않고, 책을 읽는 필요한 시간과 고독을 그에게 제공하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책을 손에 꼭 들고 한 발을 농의 구석에 댄 채 의자를 뒤로 젖혀서, 의자가 뒷다리 두 개로만 균형을 이룬 기울어진 자서세로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p.42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미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에 맞추려고 30도쯤 몸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진 재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신사의 존재는 외투의 맵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태도와 발언과 몸가짐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백작은 생각했다. 세상은 돌고 도는 거야.

사실 지구는 지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면서 동시에 태양 주위를 돈다. 은하수도 돈다. 더 큰 바퀴 속의 작은 바퀴인 셈이다. 천체는 돌면서 시계의 작은 망치가 내는 종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자연의 소리를 낸다. 그 천체의 종소리가 울리면 아마 거울은 불현듯 자신의 보다 더 진정한 목적에 맞게 일할 것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자신이 상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 실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p.65



백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지하실에서 가져온 열 권의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그 책은 그에게는 새로운 모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읽을 필요가 있을까? 누가 그에게 향수병에 빠졌다거나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전에 두세 번 읽은 소설을 또 읽는다며 시간을 낭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 않을까? p.105


"음, 모두가 어떤 말을 해줄 땐,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는 경우가 많단다."

"모두가 어떤 말을 해줄 땐 그들이 모두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니나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그렇지만 왜 모두의 얘기를 들어야 해요? 모두가 「오디세이」를 썼나요? 모두가 『아이네이스」를 썼나요?" 니나는 고개를 저으며 명확히 결론지었다. "모두와 극소수의 차이는 숫자의 차이일 뿐이에요." p.150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고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지." 그가 말했다.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거나 아니면 활력이 주는 탓에 우리는 갑자기 몇몇 익숙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지금 단계에서 너처럼 멋진 새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 p.153



아무튼 바로 얼마 전에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 만난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아니, 그 누구든 간에 그 사람에 관한 첫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첫인상이라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음이 우리에게 베토벤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 또는 하나의 붓 터치가 우리에게 보티첼리에 관해 말해줄 수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p.194



백작은 고개를 젓고 나서 빵을 한입 더 베어 먹으며 노인이 따라 주는 두 잔째 커피를 받았다. "어렸을 때 저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작은 그날 두 번째로 그 시절을 회상했다.

"사과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곳이죠."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곳에서 자랐답니다. 제 부친은 체르니코프 영지의 관리인이었고요."

"아, 나도 그곳 잘 알아요!" 백작이 탄성을 질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그리하여 여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고, 불이 사위기 시작하고, 벌들이 머리 위에서 빙빙 돌기 시작했을 때, 두 사람은 각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을 달리는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고 잠자리가 풀밭 위를 날아다니고 시야가 온통 사과꽃으로 가득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p.207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존재한 곳에서는 언제나 추방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시 부족에서 가장 앞선 사회에 이르기까지, 같은 구성원들로부터 짐을 꾸려 변경을 넘어가서 다시는 자신이 살던 땅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터였다. 추방은 인간 희극의 제1강에서 하느님이 아담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그리고 몇 페이지 뒤에서 하느님은 카인에게도 그 벌을 내렸다. 그렇다, 추방은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국외가 아니라 자국 땅으로 추방하는 개념을 터득한 최초의 민족이었다.

일찍이 18세기에 차르는 적들을 나라 밖으로 내쫓는 것을 그만 두고 대신 시베리아로 보내는 형벌을 택했다. 왜?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이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추방한 것처럼 어떤 사람을 러시아 밖으로 추방하는 것은 형벌로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로 보내면 추방당한 자가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해서 집을 짓고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즉 추방당한 자가 자 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국 대신 자기 나라로 추방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국 추방은 시베리아로 보내든 6대 도시 금지'형에 처하든 간에-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부식되어 흐릿해지거나 시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손이 미치는 곳 바로 너머의 것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는 종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훌륭하고 장려한 것들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그 어떤 모스크바 사람보다도 더 애틋하게 그러한 훌륭한 것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 모든 게 끝이다. p.267



분명 여러분의 인생에도 어느 정도 도약했던 순간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여러분은 자기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그 순간 들을 되돌아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도약하는데 약간이나마 기여했다고 인정할 만한 제삼자가 정말로 없었을까? 시의적절하게 조언해주고 소개해주고 칭찬의 말을 해주었던 멘토나 가족의 친구나 학교 친구가 정말 없었을까?

그러니 '어떻게'와 어째서'를 분석하지는 말기로 하자. 안나 우르 바노바가 다시 폰탄카강에 집을 소유한 스타가 되었으며, 그 집의 가구들에는 타원형 구리판이 부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이제는 손님이 찾아오면 그녀가 문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한다는 점이 전과 달랐다. p.318



"바실리, 우리 나이가 되면 모든 게 빨리 지나간다네. 사계절이 우리 기억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 다니까."

"시간은 우리 곁을 흐릿한 상태로 달려가기 시작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가장 큰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지. 사람이 열일곱 살이 되어 진정한 독립의 첫 시기를 경험하게 되면 감각이 아주 예민해 지고 감성이 섬세해져서 모든 대화, 모든 표정, 모든 웃음이 영원히 기억 속에 새겨지지. 그리고 그 민감한 시절에 사귀게 된 친구들이라면? 끊임없이 샘솟는 애정을 가지고 이후로도 평생 동안 만나게 되는 거지."

이런 역설을 늘어놓은 백작은 문득 로비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리샤가 프런트데스크로 한 손님의 짐을 옮기고 있었고, 제냐는 다른 손님의 짐을 출입문 쪽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아마도 그건 천상의 균형 문제일 거야.” 그가 말했다. "일종의 우주적 평형이지. 아마 시간 경험의 종합은 일정할 거야. 그러니 우리 아이들이 이 특별한 6월 어느 날의 생생한 인상을 더 많이 간직할 수 있도록 우린 우리 몫을 포기해야만 해."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린 잊어야 하는 거로군요." 바실리가 요약했다.

"바로 그걸세!" 백작이 말했다." 아이들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린 잊어야 하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불쾌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순간에 대한 아이들의 경험이 우리의 경험보다 풍부 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뭔가 손해를 본다고 느껴야 할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이렇게 늙은 나이에 변치 않는 기억들의 새로운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건 우리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리는 오히려 그들이 경험을 자유롭게 맛볼 수 있게 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해. 두려워하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해. 담요 를 푹 덮어주고 단추를 꼭꼭 채워주는 대신, 그들에게 믿음을 갖고 그들 스스로 덮고 채우도록 해야 해.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 앞에서 실수한다 해도 우리는 느긋하고 관대해야 하며, 신중한 태도를 잃으면 안 돼. 우린 그들이 우리의 감시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독려해야 해.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인생의 회전문을 통과할 때 우린 뿌듯하게 숨을 내쉬는 거지...." 백작은 증거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관대하고도 신중하게 호텔 입 구를 가리키며 모범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안내 데스크를 톡톡 쳤다. p.510



새로워진 시각으로 식당을 둘러본 건축가가 말했다.

"방이라는 건 그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의 총체라는 말씀이군요." p.522



"내겐 너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음악원 경연 대회가 열렸던 밤이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최고의 자부심을 느낀 순간은 안나와 네가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가 아니야. 그것은 바로 그날 저녁, 경연을 몇 시간 앞두고 네가 경연장으로 가기 위해 호텔 문을 나서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 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만약 제가 파리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면," 잠시 뒤 소피야가 말 했다. "전 아빠가 청중석에 앉아서 제 연주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얘야, 난 장담할 수 있어. 네가 달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 하더 라도 나는 네가 연주하는 음 하나하나를 모두 다 들을 거야." p.609



백작은 자신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절제력을 발휘하여, 부모로서의 충고를 두 가지 간단명료한 요소로 제한하였다. 첫째는 '인간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지 못하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가장 현명한 지혜는 늘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몽테뉴의 격언이었다. 하지만 이별의 아픔을 털어놓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감정을 억제하지 않았다. 그는 소피야가 없으면 자신이 얼마나 상심하게 될지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피야의 위대한 모험을 생각하기만 하면 자신이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분명히 밝혔다. p.654



모스크바를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난 후 괴로움을 토로했을 때, 아버지는 그녀에게 한 가지 생각을 얘기해줌으로써 그녀를 위로하고자 했다. 아버지는 우리 인생은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여 나아가는데, 그러한 불확실성은 우리의 인생 행로에 지장을 주거나 나아가 위협적인 경우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보존한다면 우리에게 극히 명료한 순간이 찾아들거라고 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갑자기 하나의 필수 과정이었음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든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으로 꿈꿔온 대담하고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서 있을 때조차도 그렇다는 것이 었다.

p.687



하지만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에게는 사무치는 감정이 무자비한 시간의 영향과 합쳐져 실망만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고향의 풍경은 그가 기억하는 풍경만큼 아름답지가 않다. 고향의 사과 주스도 예전만큼 달콤하지가 않다. 예전의 건물들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모했고, 멋진 오랜 전통은 심란한 새로운 오락에 자리를 내주었다. 한때는 자기가 이 작은 우주의 중심에서 살게 되리라고 상상했지만,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전혀 없지는 않다 해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옛집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 있으라고 충고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역사적 근거가 넘친다 하더라도 하나의 충고가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이웃 한 동네에서 태어난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그 예로서, 옛날에 살던 집의 폐허 앞에 선 이 여행자는 충격이나 분노나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수풀이 무성한 길을 바라보면서 지었던 것과 똑같은 아쉬움과 평온함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옛 모습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을 것이라고 예상하고서 과거의 장소를 찾는다면 즐겁게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p.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