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을 읽고
열몇의 십 대에 취하는 책들이 있다. <데미안>이라던지 <호밀밭의 파수꾼>이러던지 <이방인>이라던지, 그 목록에 나는 <죄와 벌>도 있었다. 그 후 몇 번이나 다시 읽었고 읽을 때마다 좋았다. 나는 로쟈였고 무엇 하나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웠고 주어진 환경이 원망스러웠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죄다 어둡고 아프고 어쩌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지, 그게 좋았다. 이번은 아니었다. 읽는 내내 힘들었고 불편했다. 찌는 듯한 1860년대 쌍트페테르부르크의 후텁지근한 공기가 숨을 조이는 기분이었다. 로쟈가 아닌 다른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읽는 대로 읽을 수가 없어 작가에 대해 책에 대해 자꾸 찾아보게 되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도스토옙스키가 당시 신문의 사건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작품의 제목(죄와 벌)은 물론이고 작중 인물들 모두 어느 사건의 주인공이었다.(알라냐, 로쟈, 듀냐 등) 그 유명한 소설의 첫 구절조차 어느 기사의 일부와 거의 유사하다. 당시 신문은 현재의 저널리즘과 비슷했던 듯 엄청나게 읽히고 소비되며 팔리기 위한 복사의 복사를 거듭했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기사를 열렬히 읽었고 기록했고 비판했고 작품에 녹여냈다. 이 정도면 세태소설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세태 소설이라면 쉽게 읽혀야 할 텐데 어째서 이 책은 잘 읽히지 않는 걸까.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해석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철학자나 철학이 외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 같은 문호들이 소설 안에 그만의 사상을 녹여담기 때문이라고.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체화한 인물을 등장시키기로 유명하다고 하니 어느 인물 하나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특히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로쟈의 어두운 분신으로 자신의 본능에 충실하고 이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는 인물이다. 자신의 이론대로 행동했지만 잠재된 인간성 때문에 괴로워 병까지 얻는 로쟈에게 그게 뭐 어떠냐고 던지는 식이다. 이 인물의 악행은 거침이 없고 끝날 때까지 끝나지도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선을 계속 넘고 죽음조차 그렇게 마주한다. 독자로서 힘든 점은 이 인물이 낯설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희생과 배려가 넘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스비드리가일로프가 현실감 있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로쟈에게 도망가거나 자살을 (하거나 자수를) 하라는 제시가 몹시 타당하게 들린다. 이런 익숙함이 불편하면서도 경계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는 두 번째 작품인 <분신> 이후 작품에 주인공의 분신을 계속 등장시킨다 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대척점에는 소냐가 있다. 소냐는 극심한 가난에 매춘으로 떠밀린 스물도 안된 소녀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팔았다는 점에서 선을 넘은 인물이다. 로쟈는 처음에는 소냐와 자신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지만 비참한 상황에서도 동요 없이 올곧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소냐는 유로지비인 것이다. 유로지비는 러시아 정교 전통에서 주로 세속적인 가치를 버리고 선행을 숨기고서 고행과 모욕을 감수하며 떠도는 수혜자를 일컫는다. 소냐의 도움으로 죄를 자백하며 6부가 끝난 후 유배를 간 로쟈는 오히려 양심이 편안하다며 ‘걸음을 내디디지 못하고 자수를 했다는 점에서만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한다 ‘고 한다. 소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앓다 로쟈는 꿈을 꾼다. 어떤 벌레가 질병처럼 사람들 사이에 퍼져 소수의 사람들만 살아남는 꿈은 그가 생각한 비범한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꿈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다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보인다. 계시 같은 꿈에서 깬 로쟈는 비로소 소냐를 온전히 사랑한다 고백하며 그녀의 발아래 쓰러진다.
어찌 보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한 종교적인 구원 혹은 부활로 읽힌다. 이보다는 이현우 선생님의 해석이 더 와닿는다. 구원을 위해서는 고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고 회개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 인물 모두가 아프고 괴롭다. 모두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평생을 돈에 쪼들리고 간질이라는 병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는 누구보다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보여주기식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 바로 직전까지 가보기도 했고,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도 했다. 도박에 빠져 돈을 탕진하고 빌리러 다니기도 했다. 첫 번째 부인과 불같은 사랑을 했고(까쩨리나 이바노브나의 모델) 25살 연하의 두 번째 부인을 만나 아이를 네 아이를 낳았다. 동시대의 톨스토이와 언제나 비교되는 도스토옙스키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고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을 썼다. 대문호인 두 작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서로 아직도 엄청난 팬덤을 가지고 있다.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은 도스토옙스키를 최고의 작가로 극찬했고 이동진 평론가는 가장 만나고 싶은 작가로 도스토옙스키를 꼽는다. 굴곡진 삶마저 연구와 관심이 되는 작가의 책들은 앞으로도 계속 읽힐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고 다시 읽으면 그때는 어떻게 다가올지, 기대되고 궁금하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p.11)
어떤 인간이든 아무 데라도 찾아갈 만한 곳은 필요한 법이니까요. 왜냐하면 어디든 반드시 가야만 할 때가 있으니까요. (p.27)
그는 이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가위로 도려 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p.170)
문득 그는 자신이 지금 무서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앞으로 다시는 모든 일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더 이상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누구와도 결단코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다시금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오는 충격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는 순간적으로 거의 정신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무도 보지 않은 채 방 밖으로 멀리 뛰쳐나가려 했다. (p.333)
노파는 질병에 불과한 존재이다...... 나는 어서 뛰어넘고 싶었다......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원칙을 죽인 것이다! 나는 원칙을 죽였지만, 도저히 그것을 뛰어넘을 수가 없어서, 아직 이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다만 죽일 줄만 알았을 뿐이다. (p.400)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귀하게 생각한 것, 지금까지 내 <전> 생애를 형성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걸고 당신의 문제를 고려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한다고 갑자기 화를 내시는 건가요! (p.441)
어떻게 당신 내면에는 그런 치욕과 저급함이 그와는 정반대인 성스러운 다른 감정들과 함께 섞여있을 수 있는 거지? (p.471)
여기에는 가난한 사람들 특유의 자존심이 개입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오직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게든 남들의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겠다는> 일념 하에,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의무적으로 행하는 몇몇 사회적인 의식에 마지막 힘을 모아 여태껏 모아 두었던 마지막 한 닢까지 다 탕진해 버리는 것이다. (p.556)
만일 모든 사람들이 똑똑해지기를 기다린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거야.... 어쩌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개조할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그러니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 (p.613)
당신은 정말 내가 몰랐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내게 권력을 휘두를 권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한 걸 보면, 이미 난 그럴 권리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몰랐다고 생각해? 인간이 <이>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제기한 걸 보면, 이미 <내게 있어서> 인간은 <이>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일 없이 곧바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인간은 <이>라는 사실을 내가 몰랐다고 생각하느냔 말이야..? 나폴레옹이라면 그 일을 저질렀을까 아닐까의 문제를 가지고 내가 며칠 동안 고민을 했다는 건, 내가 나폴레옹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분명히 느꼈어... 나는 이런 잡다한 생각이 주는 고통을 모두 견뎌 냈어. (p.615)
아가씨의 마음에 <가엾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구원해 주고> 싶어 지니까요. 이성을 되찾게 해 주고, 재기시키고, 더 고귀한 목적을 이루라고 이끌어 주고, 새로운 삶과 활동을 시작하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겁니다. 이런 종류의 일을 꿈꾸게 된다는 건 뻔한 일이지요. (p.700)
이 세상에서 정직함보다 더 어려운 것도 없고, 아첨보다 더 쉬운 것도 없습니다. 만약 정직함 속에 1백 분의 1 가량의 거짓이라도 섞이는 날이면, 즉각 불화가 일어나고, 그 뒤를 이어 소란이 벌어집니다. 아첨이란 마지막 한 마디까지 모조리 거짓이라 할지라도 기분이 좋아지고 만족감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겁니다. 설사 저속한 만족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만족은 만족이니까요. 아첨이 아무리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적어도 그 속의 절반 정도는 틀림없이 진짜로 보이는 겁니다. (p.702)
현재에는 대상도 없고 목적도 없는 불안, 미래에는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을 끊임없는 희생, 바로 이것이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의 전부였다. 8년 후에도 그는 겨우 서른두 살밖에 되지 않을 것이며, 또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어떻다는 말인가? 그가 왜 살아야 한단 말인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다만 존재하기 위해서 산다고? 그러나 과거에 그는 사상과 희망을 위해서라면, 아니 하다못해 공상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전 존재를 수천 번이나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갈망이 강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서, 당시에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도록 허용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p.799)
그는 다만 느꼈다.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고, 의식 속에서 무언가 전혀 다른 것이 형성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p.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