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도시의 인류학 보고서

'시티뷰'

by 고라니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책 뒤표지에 나열된 혼불문학상 심사위원들의 글 때문이었다. 은희경, 편해요, 박준, 이기호, 최진영 작가의 추천글을 보고 집어 들지 않을 재주는 없었다. 가독성이 무척 좋은 데다 주제의식도 뚜렷해 페이지 터너로 제격이었다.


한 시점, 한 도시의 인물들의 삶을 보고서 쓰듯 그려낸 것이 마치 인류학 보고서 같다는 느낌이다. 백 년 후 후대의 누군가가 이 책을 읽는다면 2024년 송도의 한 인간군상을 선연히 그려낼 수 있으리라.


발췌를 남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평등하다는 건 아름다운 미신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점 외에는 평등하지 않다. 예체능을 3일만 해보면 알 수 있다. P.37


외주를 줄 수 있는 건 최대한 주는 게 생산적인 법이다. 돈은 써야 들어오는 법이니까. 전문가는 그러라고 있는 거니 까. 몸은 트레이너에게, 살림은 도우미에게, 교육은 학원 강사에게. P. 45


"틱도 아니고 왜 그래. 듣기 싫어.

문제집을 풀다 막히면 연방 헛기침을 하는 지훈을 수미는 큰 소리로 타박하곤 했다. 언젠가부터 석진에게 불만이 있을 면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았다. 마흔이 넘어도 사람은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석진도 집에선 헛기침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신호 대기 중인 차 안에서나, 시술 중인 내시경실에선 굳이 그러지 않았다.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마다 목구멍이 간지러워 산으로 피했다. p.52


오전 여덟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살풍경한 내시경실에서 비슷한 시술 수십 건을 하다 보면 시공간이 결락된 느낌과 함께 이인감이 찾아왔다. 간을 빼놓고 왔다는 별주부전의 토끼처럼 제 몸에서 저를 빼냈다.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 나는 환각이었다. 내시경실 바닥에 크록스 밑창을 붙이고 선 몸에서 빠져나와 구석의 스툴 위에 앉았다. 병원장이 원하는 시술 건수에 맞추기 위해 최대한의 속도로 호스를 신체 속에 넣고 빼는 자신이 보였다. 하늘색 일회용 가운을 입고 간호사 들에 둘러싸여 시술을 지휘하는 자신의 동작을 꼼꼼히 관찰했다.

히잡을 데 없이 노련한 솜씨였다. 넣고 빼는 자신이 보였다. 하늘색 일회용 가을 들에 둘러싸여 시술을 지휘하는 자신의 동작을 꼼꼼히 관찰했다.

흠잡을 데 없이 노련한 솜씨였다. 다른 의료진들 역시 제 가족의 위, 대장 내시경을 석진에게 부탁할 정도이니 자기애적 망상은 아닐 것이다. 위 관찰에 3분, 대장 진입에 3분, 회수 겸 관찰에 4분. 칼같이 10분을 맞추는 석진이었다. 매뉴얼을 아주 조금씩만 위반하여 시간을 아꼈다. 내시경 기술은 빗질과 같아서 거듭하면 할수록 매끄러워졌다. 정직한 일이었다. 석진은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p.54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에 물질적인 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그게 최고인 건 확실하다고. 자궁의 암세포를 발견한 날 마세라티를 뽑았다는 장모처럼 수미도 생의 박동을 소비로 유지해 가는 유형이었다. p. 62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은 선물이 될 수 있어도 20킬로 쌀 한 포대는 선물이 못 돼. 쌀 포대가 더 비싸도 말이지. 선물의 세 계에선 무용한 게 유용하고, 유용한 게 무용하다니까. p. 73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 있었다. 배꼽이 언제나 달려 있고, 귓불이 언제나 두 쪽인 것처럼 그 마음도 늘 거기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서울로 내달렸던 석진의 마음은 욕망이라기보단 낭만이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라도 좋다는 마음. 그게 로맨티시즘의 기본 강령 아니었던가. p. 107


"아침에는 카페인, 오후에는 니코틴, 저녁에는 알코올, 밤 에는 마약, 새벽에는 SNS, 다시 아침이 되면 커피. 저번에 당 신도 커피프린스 보고 한국 왔다면서요."

"그러네요."

“아무튼 그 덕에 제가 돈을 벌죠. 사람들 속이 엉망이 되니까.” p.156


"엄청 추울 때도 내 피는 따뜻하데요. 그게 흘러나오는 걸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했어요. 죽어 있는 것 같은 순간에도 내 심장이 열심히 뛰어서 온몸에 피를 보내고 있다는 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그런 행동을 한다는 건가요?"

"당신 헛기침 같은 거죠."

뜨악한 표정의 석진에게 유화가 속삭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반짝이는 데 있으면서도 기침을 하는 이유를 알아요. 당신 속의 칼을 꺼내줄 사람이 없어서." p.202


“이 도시는 불길해요. 바다를 메꿔서 육지로 만들었다죠? 얼마나 많은 것들이 죽었을까요?"

송도는 갯벌을 매립해 만든, 아니 만들어지는 중인 도시였다. 새로운 공구의 조성을 위해 시는 100만 평이 넘는 갯벌을 추가로 매립할 예정이었다. 여의도 면적 다섯 배의 바다를 없애고도 부족한 모양이었다. 공룡 같은 크기의 덤프트럭들이 새벽마다 모래를 실어 날랐다. 환경 단체들이 시위를 벌이고 성명서를 냈지만 검은 머리갈매기와 노랑부리백로를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공허하게만 들렸다.

수미가 알려준 기사를 보고서야 그 모래가 석진의 고향에서 온 것임을 알았다. 덕적도에서 바지선으로 채취해 온 해사 만 2억 톤이 넘는다고 했다. 그렇게 사라진 바닷모래에 물고기들은 더 이상 알을 낳을 수 없었다. 서포리 해수욕장의 소나무 들도 비스듬한 뿌리를 드러냈다. 결국 덕적도의 배들이 충남 태안까지 가서 어업을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p.205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수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건 뭘까. 진지해진 석진을 방에 버려두고 수미는 또다시 헬스장으로 갔다. 칵테일과 함께 나온 프레츨은 집어 먹었기 때문이라나. 하루에 두세 번씩 운동을 하는 자신을 짐 래트라 부르면서도 멈추질 못했다. 구토가 운동으로 바뀌었을 뿐 강박적 제거 행위라는 점은 같았다. 칼을 먹는 유화가 섭식장애일까, 남의 시선을 먹는 수미가 섭식장애일까. p.229


수영 선수가 되고 싶었던 남자 하나가 바닷가의 유리를 닦다 날개 없는 새처럼 추락했다. 더러운 신발 한 쌍만 남기고서. 그 남자의 아이를 밴 여자는 그걸 꿰어 신고 어디로 갔을까. 쓸 일이 없어진 면도날을 전복의 이빨처럼 제 속에 박아 넣었던 여자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면도날을 빼주었다는 것은 착각이었다. 그 여자 몸속엔 더 거대한 면도 날이 박혀 자라고 있었으니까. 유리 건물의 벽을 타다 추락해 죽은 남자의 아이 앞에서, 클라이밍이 취미라며 웃었던 자신. 석진은 그때 그 펄펄 끓던 순댓국 뚝배기 속에 제 머리라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즈 말고, 진짜 바닥으로 내려가 벅벅 기어야 마땅했다. p.237


그제야 물고기를 바다에 풀어줄 까 하는 생각이 났다. 검붉은 봉지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매듭을 풀었다. 농어는 배를 뒤집고 죽어 있었다. 눈알이 투미했다. 살이 다 빠질 때까지 버틴다던 수조 속 물고기를 기어이 받아 나와 죽인 자신이 우스웠다. p.247


주말에도 기숙사에 남아 딱 토하지 않을 만큼 공부를 했다.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룸메이트가 물으면 석진은 웃으며 말했다.

"시골 쥐들은 말이야, 항상 뭘 그렇게까지 하냐 싶을 만큼 해야 해. 노력도, 연기도, 서울말도. 도시 쥐 비슷하게 보이려면." p.251


아버지는 칼국수를 먹으러 온 낚시꾼들을 위해 낚싯밥용 지렁이들을 준비해놓곤 했었다. 어린 석진은 자줏빛 대야에 서 꿈틀대는 지렁이들을 보며 먹이사슬 최하층에 놓인 것들의 운명을 깨우쳤다. 위로, 위로 올라가야만 그 꿈틀거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장의 돌들을 타고 올라가던 그 몸짓 자체도 벌레의 꿈틀거림일 뿐이었다. 차가운 대리석 궁 전에서 기어도, 끈적한 갯벌 가운데서 기어도 지렁이는 지렁이었다. 삶의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온 돌멩이에 걸려 허리가 끊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유화의 면도날에 턱을 맡겼던 한 사내처럼. P. 264


인공의 암벽을 오늘 것이 분명했다.

거침없이 투명한 시티 뷰를 위해 유리를 닦는 사람과 스릴을 안전하게 감각하기 위해 가짜 암벽을 타는 사람. 한쪽은 지 상으로 하강하고 있었고 한쪽은 정상으로 상승하고 있었는데 평행의 정의에 의거하여 그들은 절대 스칠 일이 없어 보였다.


줄에 의지해 오르내린다는 행위의 닮은 꼴과 달리 그들 사이에 는 무참하리만큼 아찔한 심연이 놓여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이 났다. 그게 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산다는 것은, 그저 타고난 본능만은 아니지. 그것은 일이다. 일이고 말고.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일 수는 없지. 뜻 한 것이 이루어지고 재미있고 좋아서만 사는 것이랴. 곱이곱이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며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쉿, 쉽게 말하지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