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소문이 있다. 전해진 정보는 단편적인 사진이나 출처 모를 한 줄의 말이다. 그 한 조각으로 다양한 버전의 소문이 생성된다. 확인되지 않은 누군가의 말들이 보태져 소문은 점점 커지고 언론을 도배한다. 팩트 체크는 이루어지지 않고 혹여 나중에 밝혀지는 사실에 대한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마침 제기되던 정치담론들은 소문에 묻혀 유야무야 사라진다.
자주, 빈도를 떠올리기 어려울 만큼 자주 목도하는 패턴이다. 마녀사냥의 소문으로 스러진 이들의 얼굴이 끝도 없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세계사 시간에 마녀사냥이라는 단원을 공부하면서도 매 시간 피드로 업데이트되는 소문과 연결 짓지 못한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클릭 하나가 모여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파괴하고 세상을 피폐하게 바꾸는지 상상하지 못한다. 어른들은 굵은 글씨의 헤드라인만 읽고 세상을 안다고 착각한다. 헤드라인을 눌렀을 때 들어가 보이는 자세한 내용은 읽지 않는다. 읽고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메타인지는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개념이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다.
1974년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출간한다. 작가는 이것이 소설이 아닌 이야기임을 10년 후 후기에서도 극구 밝힌다. 이는 벤야민 프랭클린이 소설과 이야기의 차이를 밝힌 글에서 연유하는 듯 보인다. 그는 근대로 넘어오며 경험과 생각이 지혜처럼 쌓인 이야기가 아닌 개인이 골방에서 사유한 것들이 소설이라 표현한다. 더욱이 자본주의가 도래하며 순간에만 집중한 정보가 위협적으로 등장해 개인을 통제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만듦을 지적한다. 이 책은 '이야기' 임을 전제로 단순히 정보의 나열이 아님을, 개인의 감상에 의한 지엽적이고 고립적인 창작물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굉장히 얇은 이 책은 당시 독일에서 엄청난 논쟁을 일으킨 동시에 베스트셀러였다. 지금 읽어도 잡은 순간 다 읽어 내릴 만큼 재미있다. 놀라운 점은 50년 전 독일의 상황이 2025년 한국과 소름 끼칠 만큼 닮아 있다는 점이다. 분단국가의 정황과 자신과 다른 집단을 사회주의자로 몰아가는 모습이나 언론의 도를 넘는 무분별한 보도, 수사기관의 정보 유출, 자본가의 정보 조작, 대중의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 식의 인지 등 배경만 바꿔 출간해도 무방하리만큼 비슷하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고 더 씁쓸했다.
책에 등장하는 신문사는 지금도 현존하는 독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을 모델로 하고 있으며 68 운동의 흐름 속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에 견해를 밝힌 작가와 신문사와의 갈등이 책의 시작이었다. 작가는 실제 사건의 인물이었던 대학교수인 남성을 가사도우미인 여성으로, 성별과 계급을 완전히 바꾸어 책을 쓴다. 사건의 큰 흐름인 언론이 한 개인을 어떻게 파괴하고 변화시키는지를 순차적으로 사건에 관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다. 한 개인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회복 가능하지 못할 만큼의 상태가 되는 것은 동일하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책 속 주인공의 성격이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모두 주인공에게 매료되고 경외심을 느꼈으리라 생각될 만큼 주인공은 올곧고 바른 사람이다. 진술서의 표현 하나하나에도 꼼꼼하며 적확하고, 모든 세무자료가 빈틈없이 완벽하며 생활이 깨끗하다. 마지막 장까지 책을 넘긴 후 첫 부분에 나온 주인공의 자기소개 독백 전체를 읽으면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다. 일반적인 것을 넘어 모범적인 시민이 국가가 보호해주지 않은 폭력에 어느 수준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명예라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부여하며 지켜주는 것인지 무력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자신이 기재한 아래 세 항목에 맞추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제목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부제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모토 :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태 묘사 중에 <빌트>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제목은 주인공의 관점을 반영한다. 대중은 그녀에게 명예가 있는지, 심지어 그것이 잃어버렸다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삶의 전부일 명제다. 부제는 책 전체가 서술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그것이 초래하는 영향에 조차 무지한, 무력하리만치 무식한 기자의 얄팍한 펜대는 한 사람을 사건의 연관자에서 살인범으로 몰락시킨다. '진짜' 범죄자로 변모시킨다. 이미 그에 의해 시대사적 인물이 되어 범죄자와 진배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헌사의 자리에 길게 자리 잡은 모토는 이 글이 '이야기'임을 말하며 '빌트'지를 모델로 하고 있고 작가는 이것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꼬집어 말한다.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겠지만 읽는 이들에게는 곱씹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단 사흘 동안 벌어진 일이다. 축제기간 동안 지인들이 모이는 파티가 있었고,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다음 날 남자가 떠난 후 경찰이 들이닥쳐 여자를 조사한다. 취조 내용은 실시간으로 신문으로 보도되고 여자의 모든 지인의 인터뷰가 기자의 왜곡된 언어로 기재된다. 여자는 하루 만에 사회주의자 아버지와 알코올중독자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냉정하고 집에 신사들의 방문을 받는, 가사도우미 수입에 비해 좋은 아파트에 사는 헤픈 여자가 된다. 악의적인 보도에 그녀의 집에는 온갖 종류의 저질 전단지가 쏟아지고 음란하고 욕설 가득한 전화가 오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절도와 살인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뿐, 자세히 범행내용이 서술되지 않는 남자는 결국 경찰에 잡힌다. 카타리나의 어머니는 투병 중 기자를 만난 후 충격으로 숨지고 기자는 이를 끔찍하게 보도한다. 기자를 만난 카타리나는 그를 쏘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다며 바로 자수한다.
수사 내내 카타리나는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심문 내용이 어떻게 실시간으로 세세하게 왜곡되어 보도되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묻자, 검사는 대중의 관심에 대한 권리를 언급하며 사실이 아닌 보도에 관해서는 소송이 가능하다고만 답한다.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은 외면하면서 기본권에 앞서 알 권리를 내세운다. 다수가 원하는 정보라면 개인의 인격과 생족권을 침해하는 수준의 기본권조차 침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유출하는 국가 공무원은 죄가 없는 것일까.
누구나 카타리나가 될 수 있다. 어떤 시점, 어떤 상황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만날 수 있다. 한병철은 2023년 '서사의 위기'를 통해 삶의 모든 순간을 정보로 남기려는 현시대를 경계했다. 정신과 사유와 이야기가 없는 정보는 소비주의의 가장 큰 도구이자 무기로 사람들을 스토리셀링의 노예로 만든다. 행복의 순간은 과시로 남기면서도 반대의 기록은 없다. 나일리 없고 나일 수 없을 거라는 안일한 믿음은 얄팍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불행은 찾아오며 그 순간에서야 오만을 깨닫는다. 자본주의의 삶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보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하며 사유해야 한다. 나 하나쯤이야, 설마 나겠어, 의 안일함을 내려놓고 멈춰 서서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의 불행을 정보로 삼아 소비하기보다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2025년이지 않은가.
작가가 홀로 앉아 글을 쓰고 있으나 작가로서의 자신과 자신의 글은 사회적 문화적 생성 콘텍스트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뵐은 자기 작품들의 뿌리를 19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평한 바 있듯이, 뵐은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독일 작가 이미지에는 부합되지 않는 작가로 '독일의 죄의식"을 작품화했다. 그는 "사람이 살 만한 나라에서 사람이 살 만한 언어를 찾는 일"이 전후 독일 문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다. 전후 세계적인 재난을 경험하고 고향을 상실한 보통 사람들이 살 만한 공간에서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이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언어를 회복하는 작업, 즉 '언어 찾기'가 동시대 문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 서 그는 이웃, 고향, 가족, 사랑, 종교 그리고 따뜻한 식사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일상과 삶을 다루고, 사회에서 소외 혹은 '탈락'된 자들의 순수한 인간적 가치를 보여 줌으로써 "휴먼 미학(Asthetik des Humanen)"을 구현하고 있다. p.167
제목, 부제, 모토라는, 얼핏 보기에는 사소한 것 같은 이 세 가지가 이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이것들은 이야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이 이야기의 팸플릿 같은 경향(이것은 사실 경향소설이다!)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읽거나 분석하려는 사람은 일단 제시된 이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이미 해석이나 다를 바 없다. p.162
진술이 이 부분에 이르자 볼터스하임 부인에게도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지되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는 안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는 걸 그녀는 믿어도 좋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비밀 보장을 위해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변론을 하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모임)에 끼지도 않는 자라면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결코 주지 않는 법임을 단호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젊은 코르텐 검사였다. p. 72
국가가 (이렇게 그녀는 표현했다.)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그사이 그녀는, 심문이 왜 '삶의 세세한 구석까지 파고드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심문이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게 되었노라고 했다. 하지만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 신사의 방문 같은 문제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에서 하흐 검사가 끼어들어 당연히 피텔 사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지대한 터라 언론의 보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직 기자회견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던 피펜의 도주로 인해 이제 불가피하게도 두려움과 격분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피텐과의 친분 관계 때문에 시대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이로써 당연히 관심을 가질 권리가 있는 여론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모욕적이고 어쩌면 중 상일 수 있는 언론 보도의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으며 수사 당국 내부에 '허술한 부분이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에는 당국이 (그녀는 이를 신뢰해도 좋다고 한다.) 그에 대해 소송을 걸고 그녀의 권리를 위해 도울 거라고도 했다. p.67
심문이 오래 걸린 까닭은, 카타리나 블룸이 놀랄 정도로 꼼꼼하게 모든 표현을 일일이 검토했고, 조서에 기록된 문장을 하나하나 큰 소리로 읽어 달라고 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예를 들어 앞장에서 언급된 남자들의 치근거림이 처음에는 조서에 다정함으로, 즉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몹시 분노하며 있는 힘을 다해 반대했다. 개념 정의를 두고 그녀와 검사들 혹은 그녀와 바이츠 메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후자의 경우였노라 주장했다. 심문에 참여한 신사들이, 그런 것은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심문이 보통보다 더 오래 걸리면 그건 그녀 탓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차이가 그녀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그녀가 남편과 헤어진 이유 중 하나도 이와 관련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다정한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고 늘 치근거렸다 했다. p.33
그는 다음 면을 읽고, 《차이퉁》지가 카타리나는 영리하고 이성적이라는 자신의 표현에서 "얼음처럼 차고 계산적이 다라 는 말을 만들어 냈고, 범죄성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을 표명한 말에서는 그녀가 "확실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라는 말을 만들어 냈음을 알게 되었다. p.40
고등학교 교감으로 퇴직한 베르톨트 이페르츠 박사와 그의 부인 에르나 히페르츠는 블룸의 행적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특별히 예상 밖“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렘고에서 요양소를 운영하는 결혼한 딸 집에 머물고 있는 그들을 《차이퉁》의 한 여기자가 찾아냈는데, 그곳에서 고대문헌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히페르츠는 (블룸은 3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모든 관계에서 과격한 한 사람이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군요."라고 했다.
블로르나가 나중에 히페르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맹세했다. "카타리나가 과격하다면, 그녀는 과격하리만치 협조적이고 계획적이며 지적입니다. 내가 그녀를 잘못 보았나 보군요. 그런데 난 40년간 경험을 쌓은 교육자요. 사람을 잘못 보는 일은 거의 없는데요." p.47
그는 블룸 부인에게 사실들을 들이댔지만, 그가 괴텐을 전혀 몰랐던 탓에 모든 것을 이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차이퉁》에는 이렇게 썼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p.114
진술이 이 부분에 이르자 볼터스하임 부인에게도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지되었다. 언론의 자유를 경솔하게 침해해서는 안되며, 개인의 소송도 정당하게 취급되고 불법적인 정보의 원천에 대해서는 신원 미상의 인물에 대한 소송이 제기된다는 걸 그녀는 믿어도 좋다고 했다. 여기에서 언론의 자유와 정보의 비밀 보장을 위해 거의 열정적이라 할 만큼 변론을 하며, 질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그런 무리(모임)에 끼지도 않는 자라면 언론에도 그를 거칠게 묘사할 빌미를 결코 주지 않는 법임을 단호히 강조한 사람은 바로 젊은 코르텐 검사였다. p.72
그들은 살인자이자 명예를 훼손한 자라고. 그녀는 물론 그런 것을 무시하지만, 무고한 사람들의 명예, 명성 그리고 건강을 앗아 가는 것이 이런 종류의 신문사 관계자들의 의무인 모양이라고 했다. 그녀가 마르크스주의자일 거라고 잘못 추측하고 있던 하이넨 박사는 (아마도 카타리나의 전 남편 브레틀로가 그녀에 대해 암시하는 말들을 <차이퉁>에서 읽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냉담함에 다소 놀랐고, 그녀에게 그것이, 이러한 신문의 그물망이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카타리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p.118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 그가 자신의 후각을 정의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블로르나가 그에게 설명을 부탁했을 때, 즉 그가 자신의 후각을 정의할 수 없다면 대체 공산주의의 냄새란 어떤 냄새인지, 소위 공산주의자 냄새가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아주 비협조적이었다. 이 대목에서 (유감이지만 이것을 꼭 말해야겠다) 그 신부는 상당히 불친절해졌고, 블로르나에게 가톨릭 신자냐고 물었다. 블로르나가 그렇다고 하자, 그 신부는 그에게 순종의 의무를 다하라고 했다. 블로르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 순간부터 그는 블룸 가족을 조사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p.133
한병철, <서사의 이해> 중
이야기는 그 안에 든 풍부한 경험과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준다. 반면 허구에 기반한 소설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은 답답함'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반면, 소설은 고독과 고립에 처한 개인이 낳은 산물이다. 심리분석이 포함된, 그리고 해석이 곁들여진 소설과 달리 이야기는 서술적이다. "특이한 것, 놀라운 것을 최대한의 정확성으로 서술하면서도 사건의 심리적 맥락을 독자들에게 주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최종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다. "이제 우리는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서사적 형식에 영향을 미친 적이 결코 없었던 메시지의 형식이, 언론이 시민계급에 대한 숙달된 지배를 가능케 하는 주요 도구가 된 고도 자본주의 하에서 시민계급에 대한 완전한 지배수단으로 부상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일을 정보가 수행한다. 정보는 이야기와 다르면서도 소설보다 훨씬 위협적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이 새로운 메시지의 형식이 바로 정보다." p.20
기억은 체험한 것의 기계적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 이야기되어야 하는 서사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체험한 것의 빠짐없는 재현은 이야기가 아니라 보고서나 프로토콜에 불과하다. 이야기하거나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잊어버리거나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투명 사회는 이야기와 기억의 종말을 의미한다. 어떤 이야기도 투명하지 않다. 투명한 것은 정보와 데이터뿐이다. 54
빅데이터는 사실상 설명하는 것이 없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빅데이터는 사물이 왜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인과적 맥락도, 개념적 맥락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째서'가 '개념이 결여된 그것이 그렇다'로 완전히 대체된다.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반면 빅데이터는 완전히 열려 있다. 종결 형식을 띤 이론은 사물을 개념적 틀에 담은 후 그것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적 개념과의 작별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개념 없이도 작동한다. 지능은 정신이 아니다. 사물의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이야기는 정신만이 할 수 있다. 지능은 계산하고 센다. 정신은 이야기한다. 데이터 기반 정신과학은 정신을 탐구하는 과학이 아니라 데이터 과학이다. 데이터는 정신을 몰아낸다.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영점에 해당한다. 데이터와 정보로 가득한 세상은 이야기할 능력을 위축시킨다. 그 결과로 이론은 잘 구축되지 않으며 매우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p.103
서사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날것의 사실 또는 숫자보다 효과가 좋다. 감정은 무엇보다 서사에 반응한다. 스토리를 판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판다는 말과 같다. 감정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신체의 본능 층위에서 행동을 제어하는 대뇌변연계에 그 시스템을 두고 있다.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인지적 방어 반응조차 피해 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전 반성적 층위의 삶을 점령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피해 간다. p.134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이와 반대로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