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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26. 2022

아름다운 것은 사람

D+117,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아름다움도 적응이 되면 빛이 바래는 걸까. 플리트비체의 첫인상은 사실 실망스러웠다. 크로아티아의 보석이라는 말, 발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는데.


    기대가 과했던 탓만은 아니다. 경이로움은 노르웨이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고, 평화로움은 핀란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다고 느꼈다. "괜히 왔나"라는 생각이 스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걸었다. 이 보통의 풍경이 주는 평온한 감정 상태에 머무르면서.


'보통의 풍경'이라고 하지만, 아름답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별거 없네'라는 다소 오만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 건 한 시간쯤 걸은 다음이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핸드폰을 잠시 꺼뒀는데, 그 탓인지 주변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이 눈에 띄었다.


    호수를 유영하는 오리를 보며 소리 지르는 어린 꼬마들. 60년 지기 우정은 족히 되었을법한 할머니들이 어깨를 두르고 찍는 단체사진. 한 손엔 첫째의 손을 잡고 어깨 위엔 둘째를 목마 태운 젊은 아빠. 모두의 표정이 무척이나 환했다. 나도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어쩌면 플리트비체의 진짜 색깔은 사람들의 표정 속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엔 깎아지른 절벽도 호기심을 자아내는 기암괴석도 푸른색 빙하도 없다. 대신 잘 닦인 나무 데크를 따라 걷기 좋은 길이 마련돼 있다. 충분한 휴식공간, 접근성을 높여주는 공원 내의 교통수단들, 체력과 기호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루트가 있었다.


    덕분에 다리가 충분히 튼튼하지 않아도, 체력이 예전만 못해도, 약하고 혼자 걸을 수 없는 이와 함께여도 초록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곳. 함께하기 좋은 곳이다. 나도 누군가와 다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플리트비체 안에는 큰 호수가 있다. 중간중간 어렵거나 너무 긴 코스는 건너뛸 수 있도록, 호수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유람선을 통해 사람들을 실어 날라준다. 전체 코스를 모두 돌 생각은 아니었기에 나도 건너편으로 이동하기 위해 배에 올랐다. 자리가 많지 않아 사람들 옆에 껴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내 앞자리에는 3대가 함께 온 대가족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고사리 손을 잡고 이쪽저쪽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엄마와 아빠는 품에서 까르르 웃는 아이를 안고 물살을 구경하는 모습.


    나도 그들을 따라 유람선의 뱃머리를 따라 갈라지는 물살을 지켜보다가, 제일 멀리 제일 높이 가고 싶어 했던 예전의 마음들이 갑자기 우스워졌다. 점수를 더 올리고, 권위를 더 세우고, 더 좋은 학교나 직장에 가기 위해 발버둥 쳤던 시간들. 비겁하게도 능력이 그리 출중하지 못해, 스스로 올라가는 대신 타인을 낮추는 방법을 선택했던 때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그렇게 스스로를 과히 절상하거나 애써 타인을 절하하며 보냈던 시간들을 되새김질했다. 오히려 별거 없는 건 플리트비체가 아니라 혼자 낑낑대며 올라갔던 정상일지도 몰라. 조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플리트비체를 떠나 인근의 일몰이 아름다운 작은 도시, 자다르로 향했다. 해안가로 온 탓인지 날이 한결 따뜻해져, 반팔 차림으로 해수욕을 즐기는 이들도 많았다. 바닷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일몰을 기다렸다. 파도의 부딪힘에 따라 음을 내도록 고안한 예술작품인 '바다 오르간'의 연주를 들으면서.


    "와아!"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요트 운전자가 솜씨 좋게 재주를 부리며 바다를 가로질러 간다. 해는 어느새 산등성이 아래로 내려갔고, 붉은색과 하늘색 물감이 섞여 세계가 온통 연보라 빛깔로 물들었다. 바다가 아름답다. 하지만 그보다도, 한데 모인 여행자들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참 좋아 보였다. 찬란한 광경에 상기된 탓일까, 그들의 표정도 분홍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바다 오르간에서 일몰을 기다리는 사람들


    내가 있던 도시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바다가 없는 사람은 슬프다. 사방을 둘러봐도 한 줄의 지평선도 발견하기 어려운 도시의 빌딩 숲은 사람의 마음을 턱턱 막히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 없는 바다도 꽤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생존하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쓰게 만드는 사회에서, 그래서 아무도 바다를 즐길 수 없다면. 홀로 아름답기만 한 바다는 행복할까.


    '아드리아'는 이탈리아 북부의 어느 도시 이름인데, '검은 도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로부터 바다의 이름이 지어졌다. 해가 지고 나니 뒤편의 도시는 금세 검어졌다. 짧은 일몰을 모두 즐긴 사람들은 검은 도시 속으로 하나둘씩 모습을 감췄다. "나도 일어나야지" 하고 몸을 돌렸다가, 아직은 붉은빛을 머금은 바다를 뒤돌아봤다. 태양도 우리처럼 검은 물속으로 잠겨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검은 도시로 발걸음을 옮기며, 여행을 마치면 내가 돌아가야 할 또 다른 검은 도시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했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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