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14, 크로아티아 모토분
"빵빵!"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뒷차가 연신 클락션을 울려댄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지만 딱히. 초록불이 되자 낡은 은빛 세단이 내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운전자들과 눈이 마주친다. 나보다 몇살은 어려 보이는 백인 남성 서넛이 무례한 손짓과 표정으로 조롱하곤 붕-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다. 뭐라고 대응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한국어 번호판이 우스워 보인걸까.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한 첫날 밤, 이 나라의 첫인상은 이렇게나 구렸다.
예정보다 자그레브를 일찍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맞닥뜨린 얼굴이 불쾌하니 그 이후로 무엇에도 애정을 두기가 어려웠다. '여행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잖아'. 그냥 크로아티아를 떠날까 고민하다, 진짜 크로아티아는 바다를 낀 소도시들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가봐도 별게 없으면 빠르게 아래쪽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정해둔 채.
중간에 모토분(Motovun)이라는 작은 마을에 들르기로 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고 한다. 어린왕자의 보아뱀처럼 생긴 언덕의 능선을 타고 동유럽 풍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가운데엔 요새와 탑이 솟아 있다. '천공의 성'이라는 별명이 어지간해서는 어울리기 쉽지 않을 텐데. 그러나 구글 속 모토분은 꽤나 훌륭하게, 그 별칭에 걸맞는 모습을 은은히 자랑하고 있었다.
차로 꼬불꼬불 도로를 올라 언덕 중턱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좁은 골목과 요새의 성벽을 올랐다.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 산책하는 느낌으로 한바퀴를 다 둘러볼 수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내려가는 와중에,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토분에 있으면 천공의 성이라는 점을 알 수가 없다! 이곳에 가보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그 모습을 정작 나는 실제로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감상하라면 조금 떨어진 다른 스팟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어떤 여행자들은 모토분에 직접 오지는 않고, 주변의 다른 마을에 들러 모토분을 구경한다고 한다. 실제로 구글에 검색해보니 몇몇 유명한 사진 스팟들이 있었다. 필경 그곳에서는 '천공의 성'을 한 눈에 볼 수 있겠지.
사람들이 여행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걸 느낀다. 여행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어플리케이션이 구글맵 다음으로 인스타그램이라더라. 제일 뜨는 여행지는 '인생샷 성지'이고, 동행자의 주요 업무는 좋은 사진을 찍어주는 일.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도 역사와 배경을 설명하는 가이드투어는 지고, 인생샷을 찍어주고 트렌디한 곳에서 '핵인싸' 라이프를 즐기는 인플루언서 투어가 뜨고 있다. 충분히 납득이 간다. 지금은 SNS의 시대, 자기행복의 시대, 핵인싸의 시대니까. 국가나 민족, 신같은 추상적인 것들은 구체적이고 살아 숨쉬는 우리 자신에게 자리를 빼앗겼으니.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라는 알랭 드 보통의 말은 '여행은 인스타의 산파다'로 바뀌어야 할지도.
그러나 아무렴 어떨까. "여행은 이래야만 해"라는 말이 타인의 것은 물론 자신의 여행까지 망치는 주범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기는 커녕, 그게 뭔지 아는 것조차 어려워 헤맬 때가 많지 않나. 최소한 알았다면 한 걸음을 내딛은 셈이고, 그것을 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거다. '천공의 성'을 즐기는 단 하나의 방법 같은 건 없다. 모토분에 올라 선선한 바람에 행복감을 느끼든, 근처의 마을에서 멋진 사진을 남기든,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곳이 천공의 성이 아닐지. 이날 내 사진첩에는 능선 위의 멋진 성 대신 좁고 오래된 골목길만 남았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