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8, 터키 카파도키아
그 유명한 카파도키아에 왔다. 카파도키아는 이 지역의 통칭이고, 여행자들은 주로 '괴레메'라는 작은 마을에 머무르게 된다. 황량한 대지에 펼쳐진 특이한 모양의 괴석들과, 바위 절벽 위로 떠오르는 수많은 열기구가 아름다운 곳. 나도 그 풍경을 보러 왔는데. 열기구는 생각보다 타는 것도 보는 것도 어려웠다. 타려면 꽤 큰돈을 지불해야 하고, 보는 건 테라스를 가진 좋은 숙소에 묵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야 볼 수 있다. 모든 걸 차치하고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내가 있는 동안은 바람이 내내 세게 불어서, 결국 나는 탈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열기구 없이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이곳의 대지는 화산의 작용으로 생겨나 태생적으로 토질이 부드러운데, 옛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땅을 파고 숨어들며 도시가 만들어졌다. 곳곳에 숭숭 뚫린 구멍들과, 여전히 괴레메에 있는 '동굴집'이 그 흔적이다. 한번 체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겉만 동굴이고 안은 현대적으로 꾸민 호텔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흉내만 내는 것보다는 진짜 동굴집에 묵고 싶어,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곳을 에어비앤비로 예약했다.
그리고 이틀 동안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생각보다 춥고, 너무 좁고, 햇빛이 들지 않아 음침하고, 따뜻한 물은 전혀 안 나오고… 여행을 하며 열악한 주거 환경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숙소에 있는 게 힘들어 괴레메에 있는 내내 계속 밖으로 나돌았다. 양치할 때마다 이가 시리고, 샤워할 때는 물이 너무 차가워 얼굴이 띵했다. 얼른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집주인 지한은 내 또래의 청년이다. 그의 집(동굴)에 딸린 안쪽 방(동굴)에 내가 머무르는 형태였다. 그의 집에는 가스가 전혀 들어오지 않아 지한은 매일 가스버너로 아침을 해 먹었다. 전기는 밖에서 릴선으로 들여오고, 와이파이는 주변 호텔의 것을 빌려 쓰고 있었다. 아마도 허락은 없었겠지. 그리고 그는 매일 새벽같이 나가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다. 그래서 그의 집(동굴)에서 머무르는 3일 간 한 두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잠꼬대가 심한 편인지 자는 동안 앓는 소리를 자주 냈다.
주제넘은 걱정 일지 모르겠으나 그의 생활 조건이 신경 쓰였다. 나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그의 삶은 이곳에서 계속되니까. 괴레메에는 늦게까지 빛을 내는 비싸고 이쁜 호텔들이 많다. 동굴집을 흉내 낸 럭셔리한 그곳들. 관광객들은 따뜻하고 편안하게 동굴 아닌 동굴을 즐기다 간다. 그 사이사이 움푹 파인 구석에, 빛도 바람도 들지 않는 어둑한 집들이 있었다. 진짜 동굴집에 여전히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관광산업이 소외받는 이들의 양식을 비싼 값에 파는 동안에, 그들의 삶은 점점 비싸지기만 할 뿐 나아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원망일까. 다정하고 성실했던 지한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닐 암스트롱은 "진작 이곳에 와 봤더라면 굳이 달에 갈 필요가 없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질적이고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던 곳. 그 밑엔 도망쳤거나 쫓겨난 이들의 삶의 흔적이 절절히 남아 있었다. 특히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도망 온 기독교인들은 집뿐만 아니라 교회와 공동생활공간 등을 동굴 안에 만들었다. 심지어 인근 데린쿠유에는 곳곳을 돌문으로 막아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었다.
마치 개미굴처럼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서로 연결되고 모여든 집들을 보며 서울의 쪽방촌을 떠올렸다. 물론 다르지만. 그런데 1,000년의 세월이 무색하진 않을 만큼 충분히 다른가. 생각해보면 잘 모르겠다. 종교가 달라 쫓겨나던 그때의 사람들과 돈이 없어 밀려나는 오늘의 사람들은 또 얼마나 충분히 다른가. 분명 열기구를 보러 카파도키아에 왔는데, 하늘 위가 아니라 땅 아래만 줄곧 보다 가는 느낌이다. 괴레메를 떠나는 날 나는 지한을 만나지 못했다. 그는 출근하느라 인사를 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여러 번 답장을 쓰고 지우다, 나도 그저 '행운을 빈다'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