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같지 않은 소설
결론부터 말을 하면, 사람은 변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자는 절대 부엌 입장 금지' 이론을 가진 친할머니, 아들과 손자 등 남자만을 더 좋아하는 분이다. 본인은 정작 여자이면서, 여성의 인권신장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맨날 우리 엄마만 며느리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그런 친할머니를 보면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하루아침만에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들어 담배를 끊어버린다든지, 섹스 중독자일 정도로 육체적 관계를 탐닉했던 한 인간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한 사람과의 관계만을 갖는다던지 하는 일을 바라보면, 사람의 변화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난 이 두 가지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에 한 표를 선언하고 싶다. 그 이유는 내 친구 일화 덕분이다.
"예린아, 연애 못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어."
내가 고심해 마련한 소개팅 자리를 또다시 마다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수연. 그렇다. 그녀는 참 매력 있게 생겼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에 진한 눈썹, 갈색 빛을 띠는 눈동자와 오뚝하지는 않지만 적당하게 솟아있는 코, 벚꽃향이 나는 듯한 그녀의 입술은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두껍다. 체리빛이 띄는 것 같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약간은 통통하게 보일 수 있지만, 가슴의 라인이 아름다운 그녀는 생각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았다. 주변에 항상 남자들이 줄을 서 있었고, 하나의 연애가 끝나면, 바로 다음 연애 대상자로 갈아탔다. 그런 그녀는 눈이 그리 높지는 않았다. "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아." 이런 식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딱 한 가지 참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연애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남자". 즉, 모태솔로들이다.
태훈이는 내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이다. 그는 불운하게 남중, 남고를 나와서 한국 대학 공대를 들어갔다. 우연히 모두 남자만 득실득실거리는 집단들이었다. 딱히 여자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흥미는 정말 없었다. 소개팅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여자를 만나면 한 번 이상을 만난 적이 없다. 정말 괜찮은 아이인데, 내가 보증하는데, 그는 진짜 친한 단 한 명의 여자 사람 친구는 나에게 예전부터 부탁했다. "예린아, 난 너만 믿는다. 네가 생각했을 때 나랑 어울리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 나타나면, 소개해줘. 앞으로 나의 일생에 있을 단 한 번의 소개팅이 될 거야! 내가 너 신뢰하는 거 알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평소 진중한 그의 성격을 아는 나로서는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주변에 자기와 맞는 여자가 없어서 인지, 그는 진심 모태솔로였다. 여자와 한 번의 만남 이상을 이어나간 경우가 드물었다. 내가 보증한다.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쭈욱 봐왔으니까. 그러던 그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미래의 비전을 위해 한국 제일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입학하게 된다. 내가 나의 대학 때 친구이자 대학원의 인연을 이어가게 될 친구 '수연'에게 그와의 소개팅을 주선하고자 한 시기가 바로 그때이다.
때는 벚꽃이 흩날리는 봄이었다. 우리는 서울 유명 여자대학교 통계학과 대학원에 드디어 입학을 했다. 대학 때 난 빅데이터의 매력에 빠져, 스터디를 짜서 대학원 준비를 했다. 오로지 학업만이 나의 목표였다. 반면, 수연은 취업 준비하느라 학과 공부하느라 동아리 활동하느라 참으로 바빴다. 그런 그녀가 진정으로 바쁜 이유는 바로 남자들과의 연애이다. 옆에서 친하게 지켜본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매일 도서관으로 향하는 나와 함께 저녁을 먹어주었던 그녀였다. "난 이제 최근에 개봉한 영화 보러 간다. 나랑 밥 먹자고 하는 애들 많았는데, 맨날 혼자 있는 너 볼 수가 없어서, 약속 다 미루고 저녁은 너랑 먹는 거 알지? 그럼 공부 열심히 하고, 내일 보자."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녀는 인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새침데기는 아니었다. 특히 나와의 우정은 끝내줬다. 과제를 보여달라고 한다거나 수업내용을 알려달라고 한다는 등의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학점은 스스로에게 달렸다며, C를 받든, F를 받든 온몸으로 자신의 학점을 받아내었다. 졸업하기 전 계절학기까지 맞춰 들으며 겨우겨우 빵구난 학점을 메웠던 그녀였다. 취업준비를 했으나, 그 학점으로는 역부족, 그냥 모교의 대학원에 아무런 준비 없이 들어가는 걸로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잡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그 해 봄에 같은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다.
"나 죽을 것 같아."
수연이 한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퇴서 들고, 학과장실 앞까지 갔었는데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더라. 나 어떻게 해야 하니?"
난 당장 만나자고 했지만, 이미 우울의 깊은 나락에 빠진 그녀는 그 날은 쉬고 싶다면, 늦었다며 나와 만나주지 않았다. 나는 대학원에 되자 공부할 양도 많아지고, 듣고 싶은 수업도 있어서 그녀를 통 신경 못썼던 것이 생각났다. 후회가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아끼는 친구였기에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나의 절친인 태훈이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내지? 나 너에게 부탁할 거 있는데, 의학통계 듣는데 수업이 너무 어렵더라고, 외우는 건 자신 있고, 수학도 싫어하지 않는데, 통계는 기호가 너무 생소하더라. 개념도 잘 안 잡히고, 교수님들은 그냥 졸리게 책을 읽고 끝나버리셔. 혹시 여름 방학 때, 나 과외해주면 안 되니?"
난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한 아이디어가 생각이 났다. 절망에 빠진 수연이, 나의 도움이 필요한 태훈과 함께 통계 스터디를 하면 좋을 것만 같았다. 학교에 스터디룸도 많고, 요즘은 취업준비생들의 모임을 위해 공간을 많이 마련해 두어서, 어디든 함께 공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공부에 있어서 추진력 갑이었던 난, 태훈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바로 전했다. "걱정 마! 내가 과외해줄게! 조건은 두 가지야. 너 혼자만의 수업이 되지 않을 거고, 공간비용이랑 커피값은 네가 내는 거다."
태훈은 나에게 몇십만 원을 지불한 의향도 잇었는데, 공간비용과 커피값 정도는 당연하다며, 모든 걸 받아들였다. 이제 문제는 수연이었다.
기말이 시작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어서, 난 수연이와 함께 수연이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했다. 그날은 '미실'의 마지막 방송이 방영되는 날이었다. 멍한 눈 빛의 수연은 그 재밌는 드라마를 보는 둥 마는 둥,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항상 긍정적인 그녀의 입에서 부정적 단어들이 마구 흘러나왔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클래식을 틀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앞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어. 공부가 이렇게 어려운 거 몰랐어. 나 수업 끝나고, 자취방에 와서 원서로 된 책을 보면 눈물이 앞을 가려지더라. 거의 매일 울었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근데,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애들은 다 자기 공부에 바쁘고, 도움 청하기도 쉽지 않고. 과제도 혼자 어떻게든 하려고 했는데, 문제에서부터 막혀. 제출도 몇 번이나 못 냈어. 마음이 무너진다. 나 집도 어려워져서, 대학원은 학자금 대출받고 다니는 건데, 이렇게 되면 또 취업 못할 것 같아. 취업은 뭐야 졸업도 못할지도 몰라. 어떻게 하니?"
꺽꺽 거리며 한참을 울고 나서, 겨우 진정하고 그녀가 나에게 한 말이다. 난 어떻게든 돕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 다른 대학 친구가 통계 과목을 도통 모르겠다고 해서, 같이 공부할 껀데, 너도 함께 할래?" 그녀는 울어서 빨개졌지만, 윤기가 흐르는 똘망똘망한 눈을 나에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될까?"
그렇게 우리 세 사람의 여름 스터디는 시작되었다. 태훈에게는 슬쩍 말을 해 놓았다. "야! 내가 예전부터 너 소개해주고 싶었던 애 있었는데, 그 친구랑 같이 스터디하는 거야. 너에게 해줄 한 번의 소개팅은 이 스터디로 퉁치는 거다!" 태훈은 싱글벙글한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통계 가르쳐주는 것도 고마운데, 이게 네가 해주는 소개팅이기도 한 거구나! 잘되면, 너 결혼할 때 내가 세탁기 쏠게!!" 수연은 전혀 모르는 우리만의 소개팅 겸 과외는 시작되었다.
여름은 참 더웠지만, 내게 정말 친한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통계를 그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게 더더욱 좋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5년이 지난 지금 태훈과 수연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다 나 덕분이다. "모태솔로는 절대 반대"인 그녀와 "뼛속부터 모태솔로"인 그의 연애 과정을 하나부터 끝까지 지켜본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변한다면 정말 뼈를 깎는 아픔이 존재하거나, 하늘 맺어주는 우연이 존재한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내 친구 수연이를 보면 말이다. 이건 사실 나에게도 해당된다. (첨언을 하자면, '남자는 스펙'이라며, 스펙만을 중시했던 난 스펙이라곤 고졸이 다인 사람과 결혼했다.)
"태훈아 우리 집 세탁기 잘 돌아간다. 너 덕분에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