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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첨물 Jul 16. 2017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단상

97년 반핵 농활

1997년 여름. 동아리에서 반핵 농활을 기획하여 핵발전소 근처 농촌으로 농활을 갔다.

그 뒤 졸업하고, 취업하고 바쁘게 살면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생각은 기억 저편에 있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고리 원전 1호기 영구 중단과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 뉴스를 보았다.

집으로 배달된 시사인의 커버스토리 제목은 '탈핵 방정식'이었다.

그리고 97년 여름을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97년 여름. 서울 지역 대학 YMCA는 농활의 주제를 '반핵'으로 잡았다.

당시 대학 YMCA는 기존의 노동운동의 대안으로 '생태주의, 환경' 이란 내용으로 스터디와 세미나를 진행했고

대학 내 '분리수거', '복개천 반대 운동' , '새만금 간척 반대 사진전' 등의 이름으로 캠페인을 진행했었다.

그 흐름 속에서 후배들과 농활을 가게 되었다.


낮에는 양파농사, 버섯농사 등을 도와주고

저녁에는  지역 어르신과 '핵발전소 반대'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고

지역 아이들과 같이 게임이나 노래들을 가르쳐주며 놀았다.

그때에도 오늘날 논쟁이 되는 화두가 있었다.

"원자력이 아니면 에너지를 어떻게 얻을 것이가?"

수력, 화력, 조력, 태양광 발전...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상태에서 각종 통계를 바탕으로 나름의 논리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라늄의 원가 대비 전기 생산 효율성을 단연 우수하다는 데이터 앞에서 우리끼리도 갑론을박했었다.



그러나 당시엔 인터넷 시대의 태동기라 각종 뉴스나 책에서 얻는 자료는 대부분 '원자력 발전'과 관련된 곳에서 나온 자료였고, 단연 원자력의 발전 효율 우수성에 대해 나온 자료들이 많았다.

그 앞에서는 다른 대안을 내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도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통해 대항 논리를 만들었지만 상대적으로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1997년 말 IMF 경제 위기가 터졌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면서 한국 경제는 휘청거렸다.



그리고 원자력 발전은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

도호쿠 지진 이후로 후쿠시마 원전이 중단되었고, 그 후로 쓰나미가 닥치면면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원전이 파괴되면서 나오게 된 방사능과 오염된 침출수는 일본 전역뿐 아니라 태평양을 오염시켰다.

방사능 오염물질 영향도

옆 나라 일본의 사태를 보면서 '아...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은 이런 거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뉴스들 중 더 놀라운 것은 인간의 무지였다.

일본의 아나운서가 후쿠시마 채소를 먹어도 된다며 직접 먹는 방송을 했다.

배울만큼 배운 사람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정도로 무모할 수 있을까?

결국 그는 급성 백혈병에 걸려 치료 중이다.

그는 왜 후쿠시마 방사능이 오염된 채소를 먹으려고 했을까? 정말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스마트폰이 보급된 상태에서 엄지손가락 몇 번이면 관련 보고서를 쉽게 볼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애국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미신에 빠진 그의 모습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결국 이 방정식, 아니 부득식을 풀려면 식을 정확히 세워야 한다.


핵발전소로 얻는 이득 > 핵 발전소로 인류가 받는 손해


그러나 손해에 해당되는 오른쪽 항에 들어가는 것은 확률이 들어간다. 지진이 있을 확률이 매우 작더라도 그 피해로 받을 인명, 재산액이 막대하면 결국 부등식은 손해가 크게 될 것이다. 문제는 확률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핵 발전소 수명이 다 하고 났을 때 지불해야 할 해체 비용이 있을 것이다.

[참고 :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 비용 : 218조, 시사인 513호]

다행일지 불행일지 벌써 인류는 러시아, 미국, 일본이라는 강대국 세 나라의 사례가 있다. (체르노빌, 쓰리마일 섬, 후쿠시마)

더 이상 현재 국가의 이익을 앞세워 미래 국민의 생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결정을 맹목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제인 정부의 '시민 배심원단'에 의한 결정이라는 '숙의 민주주의' 시도에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국회가 더 이상 국민의 이익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례는 너무나 많이 겪어보았고 전문적인 지식이 없다 하더라고 관련 정보를 듣고 상식 수준에서 판단한 결과가 결코 전문가 집단의 판단보다 못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신선하다. 우리나라도 배심원단에 의한 재판 제도가 있을 정도로 이제는 성숙한 시민들이 있다.  그들에 대한 신뢰가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습이 자못 기대가 된다.



끝으로 시사인의 몇 구절로 '반핵 농활'로 떠오른 '원자력 발전'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다.


"원전 안전성 평가나 가동 연한 판단과 같은 기술적인 질문일수록 전문가주의의 영역이고, 탈핵이냐 아니냐와 같은 가치가 중첩된 질문일수록 민주주의의 영역이 된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안은 위험을 드러내고 공론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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