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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첨물 Mar 25. 2018

부석사와 도산서원 그리고...

고즈넉한 토향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

대학 동창 친구 둘과 함께 훌쩍 떠났다.  부석사로

아무 이유가 없었다.

결혼하기 전에 떠난 거제도 여행 이후 16년 정도가 지났다.

그때도 '백석'의 시에 나오는 '우물'을 찾아 떠났는데

이번에도 그냥 떠났다.

달라진 것은 흰머리와 중후하게 나온 '배'


첫 도착지는 소수서원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이라며  교과서에서 배웠던 소수서원은

평일이라 그런지 관람객도 거의 없이 조용히 우리를 맞아주었다.


'성리학'이라는 철학이 조선 전체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는데, 정작 잘 모르고 있는 그 세계관

그리고 그 중심에 선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소수서원 박물관엔 그 계보가 적혀있었다.

안향부터 정약용까지 6백 년 이어져 내려왔던 사상

때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몇 년 상을 지내야 하나 하고 피 터지게 싸웠다고 배운 이 성리학은

일제에 의해, 군부정권에 의해 무시되어온 역사와 함께 가볍게 다루어져 왔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아래와 같은 문구를 찾았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은 같은가 다른가"

굳이 원자론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오늘날 살아가는 나 또한 가끔 묻는 질문이다.

인공지능, 뇌 과학이 화두가 중심이 된 21세기에 다시 한번 선조들이 어떻게 생각했었나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다만 '실험'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형이상학으로만 파고드는 것은

서양 철학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나에겐 어렵고 느껴진다.

그리고 신라 고분 이후 지속적으로 출토되고 있는 '귀걸이'의 모양이 '곡옥'이라는 '태극 문향"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성리학 자체가 사물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학문이었기에 음양, 태극을 형상화한 '곡옥'은 오늘날 "십자가" 목걸이 문향처럼 아주 오랜 시간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니 새롭게만 느껴졌다.



조용한 소수서원을 뒤로하고 '부석사'를 찾았다.

"배흘림기둥, 무량수전"이 있는 아름다운 부석사는 어떤 곳일까?


최근에 고려시대 목조 건물로 더 오래된 절이 발견됨에 따라 무량수전은 2위로 밀려났지만

건축을 전공한 이들에게는 필수 코스인 이 건물은 나무의 이음으로만으로 건조되어 구조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전공이 아니라 그 정도로만 알고 아름다운 풍경 감상으로도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곳 ^^

무량수전 안쪽에 있는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은 금박이 입혀져 화려하게 위치해 있었다.

연구원의 눈에는 부처보다 벽에 붙여 있는 "스트레인 게이지"였는데, 오래되어 벽면이 앞으로 튀어나와 구조적 문제를 모니터링하려고 문화재청 사람들이 붙여놓았다고 여스님이 말씀해주셨다.

우리들끼리는 어떻게 신호를 보낼까? NFC로 주기적으로 사람이 와서 데이터를 가져갈까? 아니면 통신으로 신호를 주기적으로 보내는 것일까 하고 잡담을 나누었다.


무량수전 뒤편에 의상대사가 꼽아놓은 지팡이가 있다고 하여 가 보았는데

전설로 상징화하려는지 수백 년 동안 살아있다는 가느다란 나무 (골담초)가 유리벽 안에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살아 있었다고 믿기 좀 힘든 부분 ~~




하루에 유교와 불교라는 두 세계관을 접하고 배가 고파 부석사 앞 "종점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고 "토향 고택"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너무 만족스러웠던 고택 "토향 고택"

젊었을 때, 기재부? 쪽에서 근무하시다가 고향으로 내려와서 물려받은 고택을 수리하여 홈스테이로 숙박업을 하시는 사장님과 고택 여러 곳에 꽃이 심겨 있고, 그 옆을 직접 쓰신 시로 방문객을 맞이하시는 사모님이 너무 친절하셨다. 처음 만산고택을 예약하려다가 예약이 다 차서 이쪽으로 돌렸는데, 너무 만족스러웠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숙소 뒤편으로 안내를 해 주시면서 내년엔 좀 더 넓혀서 건물을 지으시고, 아들과 같이 운영하겠다는 사장님의 노후 생활이 너무 부러웠다. 아이들과 함께 다시 와야지 하면서 청량사로 차를 몰았다.

토향고택 뒷편에서 서서 찍은 사진 (예약은 Hotels.com에서 했다. 사랑방 1박 9만원)

도산서원은 배산임수로 위치해있는데, 뒤쪽 산이 청량산이다. 그 안에 청량사가 있다 하여 방문했다.

그런데 너무 높고 경사가 가파른 곳만 입산이 허용되어 입구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섰다.


그러면 마지막 장소인 도산서원

오늘날로 치면 대치동 유명 사립학원이다. 도산 서당으로 조그맣게 시작해서 나중에 임금으로부터 공식적인 인증서인 액자와 노비, 재정지원까지 받았으니, 공립학원이라고 봐야 할 듯...

퇴계 이황은 여러 관직을 이수하고 노년에 안동에 내려와 인재를 가르쳤다. 도산서원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영의정까지 오른 이가 유성룡이고, 뒤를 이어 그 학원 출신이 대대로 공직에 올랐으니, 이황 원장 선생님을 기리는 열의가 대단했을 듯 짐작이 간다.

옛날에는 건물의 이름이 적힌 간판을 받아서 다는 것이 대단한 하사품이라 오늘날로 말하면 "캘리그래피"가 매우 유행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한석봉이 임금 앞에서 직접 써서 "도산서원" 액자를 이황에게 주었으니 당대 최고의 학원 원장이었으리라...

이황의 글씨라고 하는데, 뫼 산자를 상형문자로 표현하고, "글서 書"의 입구 안에 "오리"를 귀엽게 그려 넣은 것이 디자인 감각도 매우 뛰어났다. 서원 곳곳에 성리학의 사서삼경 속에 나오는 한자의 의미를 담아 우물 이름, 기숙사 이름 등을 지었으며, 학원 규율을 담은 학칙과 선후배 간의 예절 등이 쓰여있었다. 20여 명이 잘 수 있는 기숙사도 있었으니, 오늘날로 따지면 대치동의 유명한 스파르타 학원이었으리라.... 직접 선조가 관리를 내려보내 안동지역 7천여 명이 시험을 보았었다고 하니, 교육열이 대단한 지방. 안동은 당대 학생들에게는 유명한 교육 도시였으리라...


도산서원에는 유독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돌아가시면서도 "매화에게 물을 주라"고 하셨다 하니, 안내하시는 분은 성리학의 매화, 지조를 이야기하셨지만, 다른 러브스토리가 있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즉 관기 두향과 이황의 사랑이야기인데, 그녀가 헤어질 때 준 매화 화분을 죽을 때까지 아꼈고, 이황의 죽음 이후에 찾아온 두향이 마침내 남한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마감했다는 이야기까지 한 편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니 먼 조상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가까운 인간미가 넘치는 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http://www.brcity.kr/news/articleView.html?idxno=733


아래 나무가 두향이 주었다는 매화나무... 꽃이 필 때 왔으면 더 좋았으리라...



1박 2일 친구들과의 여행

영주 부석사와 안동 도산서원은 옛 선인들이 현실과 내세를 어떻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황과 율곡 이이의 성학십도와 성학집요, 그리고 율곡 이이와 노승의 대화까지 이어지는 관심이 앞으로 조선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며 보낼 것 같다.

이런 시간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너무 감사하다.

건강하게 다음 언제가 될지 모르는 또 한 번의 여행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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