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첨물 Feb 20. 2016

일본인 부장님과 함께 했던 프로젝트

부장님의 퇴직을 생각하며....

한국 회사에서 외국인 인력의 운영을 지켜보면 이건 아니다 싶을때가 많다.

글로벌 기업,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인력이 들어오면

하는 일이 똑같아도 보통 계약직으로 일한다.

그리고 직급이 올라가도 조직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10여년전 일본인 부장님과 같이 일하게 되었다.

프로젝트는 학교에서 내가 했던 실험의 연장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반사형 디스플레이였다.

디스플레이를 시작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처음 도전하는 과제였다.

프로젝트 리더는 내가 할 수 있었지만 프로젝트 매니저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회사에서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는 보통 고과권을 가지고

프로젝트 책임을 지며 각종 서류작업을 하고

임원한테 보고하는 위치다.

프로젝트 리더는 실무 책임이며 실험과 보고서 작성을 병행하고

직접 아이디어를 내서 실험을 주도해가고

사원, 선임들을 이끈다.

연구소에서 하는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매니저를 포함해서 보통 4~5명이며

프로젝트가 커지면 사람이 더 늘어나게 되지만

연구소 과제는 씨앗이 되는 기술을 시작하게 되므로 2~3명이 하는 경우도 많다.


프로젝트 리더로 과제를 기획은 했지만

서포트를 해 주는 매니저를 구하기 어려웠다.

그만큼 도전적인 과제였고

한국인 부장님들은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행이 20여년의 디스플레이 경험을 가지고 계신

일본이 부장님이 열정적으로 매니저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다.

이 회사에서 볼 수 없었던 외국인 인력에게 조직을 준 것이었다.

한국어를 잘 하셨지만

문서 작성은 프로젝트 리더가 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맴버 구성은 부장님 아래로 3명 구성되었다.

정예 맴버라 생각하고

처음 도전하는 과제로 '세계 최초' 라는 타이틀을

가슴에 품고 열정적으로 진행했다.


첫 과제는 6개월

보통 10개월에서 12개월로 하는 과제 기간이지만

6개월내에 불을 켜야 했다.

주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인 부장님과 함께

밤을 새워 개발라인에서 패널을 만들게 되면서

우리 넷은 '동지애'를 느꼈다.

'두고 봐라' 성공하리라


보통 한국에서 제조업 부장들은

과제를 기획하고 서류작업을 하느라

패널을 직접 만지거나  라인에서 일하지 않는다.

그러나 직접 패널의 문제를 살펴보고

일본인 특유의 '집요함'

같이 일하는 우리들에게 '자랑'이 되었다.

 



드디어 6개월내에 패널 불을 켰다.

관련부서와의 협업을 '대리' 직급으로 풀어나가기 어려웠다.

일본인 부장으로서 관련 부서와의 협업을 이끌어내기 어려웠으므로

리더인 내가 풀어야 했다.

물어보고 논문을 보고 아이디어를 내면서 한발짝씩 전진한 결과였다.


비록 완벽한 특성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테스트셀로 시작해서 패널로 불을 켜는 것까지 해서 6개월이란 시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일본 애니매이션 동영상을 띄워 사내 전시회에 참가했다.

뿌듯했다.




다음 과제도 6개월로 잡았다. 아니 잡혔다.

도전과제로 밀어줄 때 열심히 한다는 마음으로 과제 기획을 다시 했다.

이번에도 일본인 부장님이 일본 업체 기술과 특허를 센싱하면서

아이디어 도출에 선봉장이 되었다.


이번 타겟은 사내 전시가 아닌 세계에서 가장 큰 미국 전시회 출품이었다.

이번에도 주변 한국인 부장님들은 부정적이었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어 조직장은 일본인 부장님이 했지만

고과권은 과제 맴버가 아닌 한국인 부장님이 가져가게 되었다.

지휘라인이 꼬인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번 도전하자는 마음을 가지고 밤을 새웠다.

갓 태어난 아이때문에 주말에 출근을 못 하는 경우가 생기면

결혼하지 않은 싱글 사원들이 그 자리를 메꾸어 주었다.

전시까지 3개월이 남았지만

패널 제작 속도는 너무 느렸다.

기술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한땀한땀 라인에서 맴버들이 토의를 했다.

정말 손으로 만들었다.

전시 컨셉이 정해지고

위치와 목업이 만들어지고

비행기로 샘플을 보내야 하는 일주일 전까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만한 패널이 나오지 않았다.


'포기해야 하는가'

그럼 전시장의 우리 패널이 놓일 위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임원은 계속 다그쳤다.

전시 할 수 있겠냐고


그리고 패널 한매를 만들어서

직접 들고 비행기를 탔다

크고 화려한 샘플들 옆에 조그맣게 전시되었던

 '놈'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제 성공 여부를 떠나서

지휘라인의 복잡함으로 인하여

일본이 부장님은 그 뒤로 다른 조직으로 가시고

6개월정도 더 진행한 이 과제는

'어깨 넘어로' 보았던

다른 한국인 부장님에 의하여 접히게 되었다.


그것도 '메일 한통'으로...


아쉬었다.

기술 성숙도가 낮아서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선택하지 않을 것이란

따뜻한 목소리가 아닌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일본인 부장님은 그 후로도 열정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타국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그러나 조직이 없이

언제나 '혼자'였다.


대기업 조직에서 부장들의 세계가 그러한가 보다.

밀리면 죽는다.

그러한 분위기를 모른 체

그저 새로운 것을 한다는 것에 들떠서

열정이 있는 일본인 부장님을 따라 했던

그 시간들이

어쩌면 '있을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

특별한 배려를 해 주었던 '전무'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으리라


 



LCD 경력 30년을 마치고

퇴사를 하시는 일본인 부장님

그러나 지금 있는 그 조직원들은

정작 퇴사 사실도 모른다.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모습이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차가움이 너무 싫어

다시 옛 맴버들이 모여 맥주 한잔을 했다.

아쉬움이 많은 눈빛에

좋았던 기억만을 가지고 떠나시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오쯔까레 사마데시타 !'

수고하셨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