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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Sep 23. 2024

자기 착취에 관한 고찰

미하엘 엔데의 『모모』와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중심으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갓생’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된다. 이것은 신을 의미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生)’의 합성어로, 부지런하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하는 신조어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을 때, 스스로에게 또는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일종의 금메달 같은 칭호이다. 무기력을 극복하고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활용하는 데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희망찬 트렌드이기는 하나, 그 이면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갓생’의 대항마로서 “‘갓생’을 살지 않는 사람은 나약하고 게으른 인간”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또 다른 내일을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기계마저도 지속적인 가동으로 과열된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원을 끄거나 재부팅을 하는 일이 필요하다-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지금 쉬어도 될까?’ 하는 죄책감을 갖게 만든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는 효율성의 늪에 빠져있다. 


   매년 10개의 키워드를 예측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조망하는 <트렌드 코리아 2024>가 올해의 단어로 제시한 ‘분초 사회’ 역시 ‘갓생 살기’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분초 사회’란 시간이 희소자원이 되면서 시간 효율성을 극도로 높이려는 트렌드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분초(分秒)를 다투며 살게 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사람들이 시간 저축 은행에 시간을 초 단위까지 저축하는 행태와 유사하다. 이처럼 『모모』는 1973년 작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꼬집는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모모』 속 마을 사람들은 시간 저축 은행의 영업사원인 ‘회색신사들’에 의해 설득되어 모든 시간을 경제적 이익으로 환상하여 계산하고 평생 시간을 저축하며 산다. 이때 ‘회색신사들’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본 글에서는 한병철의 『피로사회』에 등장하는 개념인 ‘성과사회(Leistungsgesellschaft)’의 목소리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우선, 성과 사회란 어떤 사회이고 성과주체가 일삼는 자기 착취란 무엇인지 살펴본 후, 『모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과사회’의 양상에 대하여 분석하고 자기 착취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제시하며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모모』에 반영된 자기 착취의 양상


1. 성과 사회 속 자기 착취

   21세기 사회는 성과사회이다. 성과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더 이상 “복종적 주체(Gehorsamssubjekt)”가 아니라 “성과주체(Leistungssubjekt)”라고 불린다. 즉, 교도소나 공장에서와 같이 통제 속에서 생활하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자신의 삶을 경영하며 성과를 내는 기업가로서의 주체이다. 규제에서 벗어나는 경향은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성을 폐기하고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을 창출해 낸다. 성과주체로서 인간은 명령에 의해 움직일 때보다,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 움직일 때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투자한 만큼 성과가 나오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도 받기 때문에, 성과주체는 더더욱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고,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 치닫게 된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므로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자신에게 성과를 내라고 명령하거나 통제하는 표면적인 타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과주체는 일련의 모든 행동이 자기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면 우울증을 겪게 된다. 긍정성 과잉의 사회는 성과를 내는 ‘성과주체’를 원하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주체에게는 낙오자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기 때문이다.     

2. 『모모』의 세계관에서 등장하는 자기 착취

   ‘시간 저축 은행’의 영업사원인 ‘회색 신사’는 시민 한 명 한 명을 찾아가 이들을 ‘성과주체’로 변모시켜 버린다. 첫 번째 대상은 이발소를 운영하는 푸지 씨이다. 푸지 씨는 평소 자기 일에 만족하고,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하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삶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무언가 지금보다 더 의미 있고 제대로 된 삶이 따로 있을 것 같다는 허망함을 종종 느끼며 살곤 했다. 회색 신사는 푸지 씨를 찾아가 푸지 씨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주고 현재의 시간을 저축한다면 노후에 그 시간이 곱절로 늘어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그는 “우리는 당신의 저축을 관리해 드립니다. 물론 얼마만큼의 시간을 저축하는가,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지요. 우리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라며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자 자유’ 임을 역설한다. 하지만, 이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인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기는 성과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유혹일 뿐이다. 이제 그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불필요한 일에 쓰던 시간들을 절약해 나간다. 그는 “회색 신사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편집증에 걸린 사람처럼 시간을 아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배기구 없이도 스스로를 강제하는 자기 착취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그는 시간을 아끼겠다는 “결론을 스스로가 내린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형태의 행위로써 어떤 자유로운 행동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 활동과잉의 역설을 보여준다.


   두 번째 대상은 관광 안내원 기기이다. 회색 신사들은 모모의 친구인 기기를 포섭하기 위해 기기가 욕망하는 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를 조금씩 변모시킨다. 이야기를 꾸며 내는 일에 재능이 있는 기기에 대한 찬사가 담긴 기사를 배포하여 기기를 한 순간에 유명인으로 만들어버리고, 인기의 맛을 본 기기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만 하도록 만든다. 그는 멈출 수 없이 계속해서 이야기꾼으로서의 삶을 이어가지만, 그는 어느새 “스스로 청중의 어릿광대이자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내던져져 있는 인간이 그 어떤 주권도 지니고 있지 못한 양상을 보이면서 말이다. 시간이 흐른 후, 기기는 모모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라고 자조하며 기기는 다시 “그런 일을 하면서 그에게서 돈을 받고 있는 여자들에게 붙들려 끌려나”가며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삶으로 다시 회귀한다. 


   회색신사들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들, 즉 가치전도와 인간소외 현상, 획일화와 그에 따른 창조적 능력 상실, 정신적 황폐화 등은 궁극적으로 인간영혼의 상실로 귀결된다. 이는 현대 사회의 병폐와 직결된다. 현대 사회의 병폐는 작품 속 회색신사들과 같이 하나의 형상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성과주체로서 현대인들이 자행하는 자기 착취가 자신의 진실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착각하기 쉽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자기 착취의 극복 : 놀이의 중요성


   모모는 회색신사들에게서 시간의 꽃을 빼앗아 그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꽃은 원래 있었던 곳인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돌아가면서 대도시는 이전과 같이 활기를 되찾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모모와 같은 영웅적 존재가 없기 때문에, 현대인들 즉 성과주체들은 스스로 자기 착취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미하엘 엔데와 한병철은 모두 ‘놀이’ 개념을 제시한다. 


   ‘놀이’란 합리화, 생산화로 일컬어지는 근대성의 제약과 달리, 스스로 선택한 규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으로서, 놀이 속에서 놀이하는 인간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지금까지 사회의 억압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개별적 특성을 발견하고 놀이의 무목적성과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진정한 자기 모습으로 자율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비단 어린아이들에게만 놀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 '놀이‘는 현실적인 생활에서 직접적인 이익을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필수 불가결의 요소인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 놀이‘란 산책을 하는 행위,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 등이 포함되고 이것의 집합체로서 여행이 있다.


   미하엘 엔데는 『모모』에서 의미 없이 놀이 자체를 웃고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묘사하고, 회색 신사들이 사라지고 난 후, 모모와 베포가 재회의 기쁨을 누리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얼싸안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멈춰 서서 같이 기뻐해 주었다. 그들은 같이 웃고, 같이 울었다. 이제 모두들 그럴 시간이 있었다.”라는 묘사를 통해 목적 없이 다 함께 웃으며 상황 자체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병철 또한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이며 이는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이라고 정의하였다.


   즉, 성과를 내기 위하여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놀이의 시간으로 자신의 몸을 내맡겨보라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한 내적 욕망을 발견하고 새롭게 삶의 방향성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기에.




   미하엘 엔데가 『모모』를 통해 21세기 사회는 더 이상 규율사회가 아니라 성과사회임을 예측했다고까지 보는 것은 과한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도구적 이성,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모모』 속 환상적 세계관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성과주체의 특징인 자기 착취의 양상이 나타났다는 점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이 자본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극단적인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사회 폐해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히 존재해 왔고 한 번에 해소되지 않는 고질적인 질병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자주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도구화되기에 철저히 분석되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 인지하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여 자기 착취를 일삼으며, 자신이 겪는 모든 난관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니체는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라고 주장하였다. 평온, 휴식, 놀이는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그 자체가 ‘성과’인 시간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효율성의 물결, 파도 속에서 진정한 자기중심, 자기 주관을 지키며 살기 위하여 놀이와 예술로의 일시적 도피를 통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이 행동을 하고 있는지 주체적인 자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염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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