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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10. 2021

발코니 정원

숨골, 오아시스

참 이상하지. 흙 한 삽 떠왔을 뿐인데 무럭무럭 자라주는 초록이들이 기특하다. 흙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씨앗을 발아하고, 뿌리내리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지. 어떤 마술 같은 힘이 들어있기에.  

사람의 발도 인체의 뿌리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흙을 떠난 사람들의 몸은 괜찮은 걸까. 어릴 때 시골에서 맨발로 흙을 밟아본 경험이 있다. 농작물을 수확하는 밭이랑 밭고랑 흙은 돌멩이도 없고 푹신푹신하다. 숨을 쉬는 땅이고 개간하는 땅이라서 더 그렇다. 가을 이 무렵 자줏빛 햇고구마를 품은 흙은 신비로웠다. 같은 밭인데 땅콩은 숫자 8을 닮은 누런 알맹이를 꺼내 주었다.   

   

흙은 무엇이든 심으면 쑥쑥 키워 공짜로 내어주는 보물창고 같았다. 구두 바닥에 흙먼지 묻힐 일이 없는 콘크리트 숲 속에 살면서 흙과 멀어지는 일이 아쉬운 날에는 작은 화분을 집으로 데려온다. 햇빛이 살가운 봄가을에는 더 그렇다.     


최근에 데려온 용담은 한 며칠 꽃을 피우더니 구름 낀 하늘 아래 도통 꽃잎을 열지 않는다. 뾰로통한 입술을 내민 꽃봉오리들이 험상궂은 날씨를 싫어하는 기색이다. 용담은 파란 하늘이 열려야만 얼굴을 환히 밝히는 날씨에 예민한 꽃들이다. 지난 일주일 꽃다운 꽃을 보이지 않은 채 봉오리 몇 송이가 기다리다 지쳐 시들고 있다. 햇빛이 살짝 비쳐드는 오늘 봉오리 입술이 삐죽빼죽 벌어질 모양이다. 청보라 빛 알전구가 반짝 켜진 틈새로 코를 내밀었더니 알싸한 향내가 그녀의 도도한 자존심을 말해준다. 맘껏 푸른 하늘 열려다오, 애수 띤 용담이 그늘지기 전에.    

 


일기예보에 개의치 않고 밤이나 낮이나 꽃피우는 바이올렛은 무던한 편이다. 언제나 피어있다. 솜털이 촘촘히 붙은 하트 잎사귀는 도톰하여 자꾸만 만지게 된다. 사람 귀처럼 생겼다. 여러 번 만졌더니 싫어하는지 빳빳하던 촉감이 힘없이 흐물거렸다. 손독을 타서 죽을까 봐 물을 주고 며칠 후 살짝 만져보니 다시 빳빳해졌다. 알겠다. 이파리가 처질 때는 물을 달라는 신호구나.      


기다란 보트 모양 잎사귀를 가진 다육이는 다닥다닥 미색 쌀알이 붙은 것 같은 꽃송이들을 한 달 전부터 매달았다. 언제쯤 꽃을 피우려고 저리 굼뜬 걸까, 저 모습이 혹시 꽃이 핀 걸까. 어느 날 작은 봉오리 끝이 연한 분홍색 수줍음을 타더니 한 잎 두 잎 팝콘이 터지듯 꽃이 피어났다. 오각형 별 모양이다. 향기는 어찌나 좋은지 꿀을 품은 밀원식물 같다. 방충망을 열어놓으면 금세 벌 나비들이 모여들 텐데 별꽃을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에 물 반 컵을 조금씩 흘려주었더니 가운데가 움푹 파인 보트 모양 잎사귀는 연잎같이 물을 동그랗게 말아 올려 이슬을 만들었다. 신기하다. 쏟은 물이 보석이 되는 재주를 부린다. 연장도 없이 순식간에 물을 세공하여 다이아몬드보다 더 빛나는 매끈한 보석을 내 눈앞에 반짝거려 준다. 이 똑똑한 식물은 움푹 파인 잎사귀에 빗물을 받아놓음으로써 갈증이 날 때 음용수로 활용하도록 진화하였다. 내 눈에는 두레박으로 보인다.    

  

바람의 시간을 젓는 보트에 심심하면 물방울을 태워서 보트 놀이를 즐기고 싶다. 꽃잎도 별, 이파리도 영롱한 물방울 별, 우리 집 발코니에는 별들이 산다. 요즘 남향 밤하늘에 떠오르는 커다란 별 목성 그리고 한 뼘 떨어진 거리 희미한 토성이 보인다. 얼음으로 뒤덮인 토성의 위성 엔셀라두스 얼음 조각이 쌩- 날아와서 우리 집 다육이 잎 위에 반짝 내려앉은 건 아닐까.    

 


흰 얼룩무늬를 지닌 벤자민 고무나무와 스킨답서스는 미학적이다. 초록색 흰색 물감을 휙 섞어놓은 듯 불규칙하게 제멋대로 뒤섞인 잎들은 한 잎도 같은 것이 없다.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다 다르게 생겼듯이 얘들도 그렇다. 개성적인 얼굴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벤자민 고무나무는 뿌리보다 이파리가 물을 좋아하여 사흘에 한 번씩 물뿌리개로 물을 듬뿍 뿌려준다. 봄 물가에 촉촉이 물오른 한 그루 아기 버드나무를 보는 것 같다. 잎사귀 생긴 모습만 보면 귀룽나무를 닮았다. 

     

어느 봄날 제이드가든에서 하얀 꽃들이 가지가지 축 늘어져 꿀벌들을 모으고 있었다. 꿀단지를 안은 꽃들의 향기는 천 리를 가듯 진하고 나무는 거목임에도 아주 아름답게 생겼었다. 처음 보는 그 나무에 이끌려 애정을 가지게 된 독보적인 이름 귀룽나무는 닥터 지바고가 바리키노로 떠나는 머나먼 기찻길 여정 꿈속에서 다가오는 무의식의 향기를 맡으며 귀룽나무가 등장한다.      


벽체 높이 매달아 놓은 아이비는 아이가 초등학교 봄 소풍 가서 받아온 작은 미니화분이 자라고 자라 바닥 가까이 줄기가 축 늘어지게 성장하였다. 세 손가락 아이비는 벽체 구석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언제나 자신의 불편한 자리를 지키면서 사계절 푸른 정글을 만들어준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닮은 율마도 우리 집에 온 지 몇 해가 되어간다. 쓸기 좋은 빗자루처럼 생긴 율마를 손으로 쓸어주면 손끝에 편백나무 향이 묻어난다. 가장 짙은 초록의 후예 변치 않는 상록수들이다.     



정원에 암석이 빠지면 이 빠진 잇몸 같은 것. 옹기 함지박 안에는 작은 바다가 들어있다. 고향 바다에서 한두 개씩 주워온 조약돌을 질서 있게 배치하고 조가비도 뿌려놓았다. 화분 살 때 딸려온 현무암 괴석도 세워놓으니 어느 인적 없는 바닷가를 혼자서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이 바다에는 지구 나이와 맞먹는 돌 할비 할미들이 산다. 억겁의 세월 바닷물에 깎여나간 둥근 성품들이 산다. 속상하고 우울한 날 여기 쪼그려 앉아서 나의 작은 바다를 들여다보면 불편한 속내가 스르르 풀린다. 보이지 않는 파도가 일어나서 내 안에 든 모나고 성난 감정들을 둥글게 깎아준다. 이 돌들이 아무 말 없는 내 스승이다.    

  

여기 돌들은 색깔 모양 무늬 질감이 다 다르다. 회색 흰색 갈색 누런색 분홍색 붉은색 돌들이 물에 닿으면 회색은 검은색으로 짙어지고 옅은 천연 색깔이 더 화사하게 살아난다. 모양은 둥글둥글 길쭉한 돌 진짜 구에 가까운 돌 납작한 동그라미에, 가느다란 세 줄 평행선이 달리는 무늬 갈색 회오리 무늬 두꺼운 띠가 새겨진 무늬 물감을 뿌려놓은 듯 점점이 찍힌 무늬 타원형 흰 구름이 새겨져 다양하다. 매끈한 질감 꺼칠꺼칠한 촉감 숭숭 구멍 뚫린 현무암은 거칠기가 사포 못지않다. 펄펄 끓는 용암이 찬 바닷물과 만난 순간 굳어버린 형체임을 항거한다. 바라만 봐도 뜨겁다. 뜨거워서 손을 대기가 겁이 난다.    

  

돌들은 굳어버린 입술로 지난 시간을 들려준다. 무생물인데도 생물처럼 살아서 지구의 시간을 말해준다. 돌이 버린 원형의 시간, 지금도 진행 중인 마모의 시간, 그리고 침묵에 대하여…… 뭐 그리 유난스럽게 아웅다웅 다투면서 내 것 하나의 치적을 더 만들려고 인상 쓰지 말라고, 애쓰지 말라고, 지나고 나면 허무해진다고…     



허무주의(니힐리즘)도 생의 중간을 지나는 주마등에 앉아서 그간 팽팽하게 잡아당겼던 고삐를 이제 그만 좀 느슨하게 잡고 가자고 말할 수 있다. 젊은 세대가 허무주의에 빠지면 곤란하다. 나도 그 시절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악착같이 돈 벌고 근검절약 지지고 볶았다. 근면한 토대 위에 선량하되 삶의 방향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페이스를 조절하였다.     

 

착함은 자신을 구제하는 최후 최선의 방어이고 변론이다. 착함은 자신과 타인에게 동시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이다. 흔히 착하다고 하면 자신의 권리를 남에게 양보하고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는 바보로 오해하는 경우 과연 그럴까. 착함과 어리석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두뇌 회전이 빠르고 얍삽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잔꾀를 부리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경우를 본다. 다른 사람을 위해 파놓은 함정에 결국 자신이 빠지는 것이다.      


착함은 우직하고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바른길로 곧장 나아간다.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뒷담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비아냥거린다. 착한 사람은 외롭다. 이득과 재미를 위해 시간을 함부로 팔지 않는다. 착한 사람은 자연을 좋아한다. 자연의 거울에 우두커니 비친 자화상을 사랑한다. 고속 송수신이 가능하다. 육감 직감 영감이라는 안테나가 달려있다. 착한 사람에게는.     


착함은 고독한 시간을 의도적으로 비워놓음으로써 유지된다. 한두 번 착하고 말 착함이 아니다. 텅 빈 시간을 걷거나 명상하거나 견디고 수양함으로써 착함의 본질은 흐려지지 않는다. 착함은 예민하다. 시간을 방만하게 쓰거나 황폐화된 내면을 되살리지 않고 버려두거나 나쁜 마음을 먹거나 언행이 어긋나면 한 치 망설임 없이 착함을 회수한다. 단번에 눈동자가 탁해지고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필터링 여과장치가 고장 난다.      


자정작용을 하는 물은 그냥 맑은 게 아니다. 끊임없이 흐르고 흘러서 맑게 흐르는 것이다. 바위를 만나 부서지고 깨지고 예고 없는 낙폭을 만나서 물보라 튀는 폭포수 되고 그렇게 밤낮 쉼 없이 흘러서 상선약수(上善若水)가 된다. 착한 자 최고 훈장이다.     


언제나 착함을 실험 받으면서 이 도시의 건조한 사막을 건너는 내게 발코니 정원은 오아시스이자 낙타이다. 초록이들을 흔들어주는 바람을 마셔야 해갈된다.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도 바깥 창문을 조금 열어놓는 이유이다. 용담이 좋아하는 야외 공간과 최대한 비슷하게 시원한 밤바람을 초대한다. 한철 머물다 가는 꽃에 대한 배려이다. 나의 공간과 시간을 할애하는 것- 애정을 주고받는 생활의 기쁨- 잘 살아가려는 징검돌!



항아리 속 나의 작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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