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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Oct 27. 2021

3. 나의 의식주

- 음식 이야기

결실의 계절 가을에는 제철 식재료가 넘쳐난다. 산 들 평지 어디를 막론하고 열매가 주렁주렁 탐스럽게 맺힌다. 창공에 대고 주홍색 알전구를 박아놓은 감나무 아래 살집 깊은 호박이 넝쿨째 넉살 좋은 이 가을의 주인같이 여기저기 퍼질러 앉아있다. 투명한 하늘을 건너온 햇살과 비, 씨앗의 창작품들이다. 안 먹어도 배부른 포만감이 시야에 듬뿍듬뿍 맺혀있다.   

  

인간은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하루 세끼 끼니를 연명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 축적된 자연스러운 인체의 리듬이자 규칙이다. 세끼를 먹어야만 건강하게 생명이 유지된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외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절로 눈이 가고 손이 간다. 군침이 돌게 만든다. 음식은 식도락이요, 맛깔난 도시락(都市樂)이다.     


먹는 즐거움이 없다면 고통받는 사람들 많을 것이다. 누구나 먹는 음식 별스럽게 보여주면서, 배 터지게 먹는 사람들 보면 미련스럽고 자신의 몸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씨줄과 날줄의 조화로움이 하루라는 시간 속에 맥박이 요동치는 그물을 짠다. 

     

만약 한 끼 음식에 들어가는 영양소를 간편하게 액상 형태 팩 한 개, 알약 한두 개 삼킴으로써 해결된다면 어떨까. 우리의 치아와 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문제가 생길 것이다. 미각을 상실하게 되고 저작을 하지 못한 치아는 약해질 것이요, 저작의 움직임과 밀접하게 연관된 뇌 기능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노년기 보존된 치아 개수와 치매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꼭꼭 씹어서 턱 근육을 움직이는 저작 운동은 체내에 들어오는 산소량이 많아지고 뇌로 가는 혈류량을 높인다. 이는 뇌에 많은 산소를 공급하여 기억력과 집중력을 높이게 한다. 저작 운동은 파로틴 호르몬(혈관의 신축성을 높이고 백혈구 기능을 활성화하는 호르몬) 분비를 도와 혈관성 치매 위험도 줄인다고 한다. 우리 전통음식 김치 나물을 잘 안 먹는 요즘 Z세대들의 턱이 갈수록 좁아져 치아 교정이 성장기 필수 과정이 돼버린 현실은 심각하다.   

   

현대인들은 하루 ‘세끼’라는 형식을 거부한다. 네 끼는 기본이요, 다섯 끼 여섯 끼를 섭취한다. 아침을 패스하면 뭐하나. 무기력한 컨디션을 보충하기 위하여 오후로 갈수록 무겁게 무섭게 보충한다. 신체 리듬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점심과 저녁 사이 간식은 필수가 돼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과일 한두 조각 마침표를 찍으면 좋을 텐데 야식을 먹는 식습관은 몸에다가 과잉 영양분을 우격다짐 밀어 넣는 자기 몸 테러이다.   

   

무엇을 먹는가, 가만히 살펴보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인드맵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육해공 널리고 널린 식재료 중에서 내가 선택하여 취할 때는 나의 철학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미각의 만족을 위해 무분별 취하는 행위는 무분별한 사고를 반영한다. 솥에서 나온 건 뭐든지 잘 먹는 사람이 복스럽다, 이런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뭐든지 잘 먹는 사람은 뭐든지 잘한다? 동의할 수 없는 거와 마찬가지다.   

  

식욕이 식탐으로 번지는 걸 막아주는 장치, 자기 절제이다. 탐욕이 강한 사람은 식탐도 강하다. 자신의 감정, 욕구를 잘 제어하는 사람은 음식을 앞에 두고 본능에 이끌리지 않는다.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평소 내 먹을 만큼만 먹게 된다. 음식 백화점 뷔페에 가더라도 김치는 꼭 먹어야 되고 샐러드 초밥 쌀국수 먹으면 금세 배부르다. 명상을 통한 훈련이 된 덕분인지 식탐이 없는 편이다. 줄곧 체중 변화가 거의 없는 점이 이를 증명해준다.     


대학생 때 간디 자서전을 읽고 채식주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원래 육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좋아하는 생선도 그때 잠시 끊어버렸다. 가난한 자취 살림에 먹을 거라곤 생선 몇 조각뿐인데 그마저 끊고 나니 먹을 거라곤 된장찌개와 탄수화물, 영양 결핍증이 나타났다. 당시 원고지에 ‘나의 음식 철학’을 써서 코팅하여 벽에 붙여놓고 실천하였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1992년 2월 써놓은 실천 사항을 소개한다.    


      

- 먹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 남이 먹는다고 먹어서는 안 된다.

- 내가 먹을 것을 먹어야 한다.

- 마음이 먹으라고 할 때 먹어서는 안 된다.

- 몸이 제발 먹으라고 할 때 먹어야 한다.

- 복잡한 조리에 찌든 음식은 체내에서의 소통도 복잡하다.

- 적어도 짜고 매운 음식은 덜 짜고 싱거운 다른 음식의 대체를 더 요구한다.

- 달고 기름진 음식은 누런 풍선 조각 같은 체내 지방 축적을 유도한다.

- 원료의 맑고 순수한 맛을 최대한 살려주는 요리가 훌륭한 음식이다.

- 과다한 양념은 음식 공해이다.

- 음식을 먹는 순간은 몸이 아닌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

- 굶주린 위장을 채우자고 먹노라면 몸이 욕심을 낸다.

- 마음이 음식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마음의 배가 불러 욕심을 삼간다.

- 그리하여 생존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음식 공해의 마지막 쓰레기 지방을 달지 않고 늙어서 더욱 고고하게 자연 속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  


        

청교도 금욕주의 같다. 백색 설원의 벌판을 혼자서 걸어가는 순혈주의 사고에 매몰되어 있었던 20대 초반 이미 미각보다는 오장육부를 생각하였다. 이 음식이 내 몸에 들어갔을 때 위장에서 연동운동이 일어나서 미즙을 만들어 십이지장으로 넘어가면 췌장과 연결된 호르몬이 분비되고 소장에서는 융모가 영양소를 섭취, 찌꺼기는 대장에서 수분 재흡수 배출되는 해부학적 구조를 배웠다. 그렇다고 해서 음식을 먹을 때 매번 그런 대사과정을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양념 범벅된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육식도 내 혀가 맛있게 반응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내 손에 고기를 만지고 싶지 않다.    

  

엄마라는 천직으로 아이들 입맛에 맞추다 보니 불고기 너비아니 고깃국 닭볶음탕 제육볶음 삼겹살 구이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내 젓가락질은 한두 점으로 그친다. 담백한 음식이 좋다. 김치 나물 된장국 두부 미역 김 해조류 무침 생선이 좋다. 내 고향 산과 바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급 식재료가 난다. 청정한 자연이 때맞추어 선물한다. 금강송이 우거진 가을 산이 내어주는 자연산 송이는 올가을 최고가를 경신해 보인다. 지난 추석에 아버지가 다섯 송이를 구해오셔서 탕국 불고기에 넣어 먹었는데 솔향이 국물에 은은하게 배어나는 멋스러운 식재료이다.      


내 고향 바다는 대게 집산지이다. <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에 기록된 울진대게는 14세기 초엽 고려시대부터 울진의 특산물로 자리 잡아 왔다. 크고 단단하며 다리 모양이 대나무와 같이 곧다 하여 박달대게로 불렸다. 후포항에서 동쪽으로 23km 떨어진 바닷속에는 동서 길이 21km, 남북 길이 54km, 여의도 2배 면적 거대한 수중암초가 있는데 이를 ‘왕돌초’라 부른다. 수심이 얕은 곳은 5m, 깊은 곳은 50m에 이른다. 이곳이 대게 서식처(용궁)이다.     

 

대게 가격도 만만치 않다. 요즘에는 너도나도 찾고 생산량은 적어서 부르는 게 값이다. 설에 고향 집 식탁에 대게 대신 홍게가 오르면 손과 입이 분주하다. 다리살은 쏙 빼먹고 등딱지 안에 붙은 녹갈색 내장 국물을 긁어서 밥에 참기름 깨소금을 넣어 비며 먹으면 짭조름 맛있다.      


지난 주말에는 콤바인이 나락(벼)을 먹어치우는 들판을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대여섯 마지기 논이 봄 여름 가을 애써 키운 허리 높이 황금 창고를 접수하면서 볏짚을 배설물처럼 뱉어놓았다. 논바닥이 장발을 깎아놓은 미장원 바닥 같았다. 기계 안에 들어간 벼들은 기다란 파이프를 통해 800kg 포대로 쏜살같이 쏟아졌다. 2톤가량 수확량, 풍년이었다. 아버지는 볏단을 안고 기뻐하셨고 엄마는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귓전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와 깔끄러운 볏짚 먼지 날리면서 수작업으로 밀어 넣던 예전 탈곡기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자동화된 농촌 추수 현장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친정 논 추수 모습, 콤바인이 지나간 자리 고속도로가 뻥 뚫렸다
파이프 라인으로 쌀이 쏟아진다, 누런 오일 시추 현장 같다


가을밭에는 끝물 고추가 온화한 빛에 다홍색으로 물들어있었다. 한여름 새빨갛던 빛깔이 더 이상 농염하게 익지 않는다. 파프리카 같은 다홍색 고추를 따고 엄마가 심어놓은 무를 한 다발 뽑아왔다. 무청 겉잎은 삶아서 풋고추 다져 넣은 된장국 끓이고, 부드러운 속잎은 붙은 채로 새우젓 넣은 무김치를 한 통 담았다.  

    

음, 너무 맛있다. 집 나간 입맛이 돌아온 이 맛! 김치 나물 먹는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가. 선조들의 지혜로 물려준 우리의 자랑스러운 식문화는 단연 K컬처 첫 번째 수출품으로 내세우고 싶다.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떠한 집에 거주할 것인가? 의식주는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하는 코드, 그 사람의 하드웨어이다. 더불어 누구와 함께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아갈 것인가? 낙엽이 뒹구는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프트웨어, 무엇을 더 보태랴.     


딸내미가 라이스페이퍼 떡볶이 해먹고 남은 재료로 만들어본 월남쌈, 직접 담근 파김치 열무김치
봄동 나물, 중국 당면 떡이 퐁당 맛나게 졸여진 찜닭


내 고향 들판에 예쁘게 피어난 가을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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