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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01. 2022

영롱한 순간, 맺힌 고드름


선생님, 기나긴 겨울도 끝인가 봅니다.

삼월 첫날 봄비가 촉촉이 내립니다.

메마른 땅에 스며든 봄비, 곧 푸릇푸릇 숨결 일깨우겠지요.

나목의 가지 끝 대롱대롱 맺힌 물방울들이 서러운 한뎃바람 이겨낸 나무들의 눈물방울처럼 보입니다. 토닥토닥 쓰다듬는 손길 같아요.

겨울을 떠나보내고 새봄을 맞이하는 계절의 길목에 서서, 누렇게 바랜 나뭇잎 귀를 기울여 듣는 한 그루 나무를 바라보며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제가 노래했던 고드름도 방울방울 져 찾아보기 힘들어진 지금 말이죠.


선생님을 처음 뵌 건 시와소금, 행사에서였어요.

여러 번 뵀는데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에 흥에 겨운 농담을 꺼내놓으시는 선생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어요. 언제나 웃음을 머금고 계셨죠.

저는 신인이어서, 연배 높으신 선생님들을 마주 대하기 어려웠어요.

2015년 정선으로 처음 초대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정선 테마 시집 출간 기념- 정선 오일장 무대에 서서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시 ‘동강할미꽃’을 낭송하였답니다. 시 낭송도 처음이었고,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람 앞에 선 것도 처음이었어요.

정선군에서 협찬을 해주었기에 무대는 후끈 열기가 달아올라 있었어요.

굽이굽이 동강 뗏목을 타고 흐르는 애환이 서린 정선 아리랑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예향의 본무대에 올라 오직 절벽에 내려앉은 동강할미꽃 심정이 되어 파르르 떨다가 내려왔답니다.

그때 제 모습 선생님도 보셨겠지요?

어떤 신인의 모습을요…


그 후 저는 종종 시 낭송 무대에 불려 떨리는 목소리로 자작시를 낭송하였어요.

2019년 엔솔로지 시집 ‘발’ 출간 기념행사에서도 ‘아버지와 자전거’ 자작시를 낭송하다 그만 울고 말았지요. 비 내리는 고갯길을 넘어가는 아버지의 자전거를 떠올리는 순간 울컥 솟은 눈물을 삼키느라 한참이나 마이크 앞에 서서 침묵을 지켜야 했답니다.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어요.

무대 앞쪽에 계신 선생님들께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올 때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남은 시 구절을 마저 읽을 수가 있었어요. 


그날 밤 조촐한 다과회를 마친 후 노래방에서 선생님의 진면목을 보고야 말았지요.

화려한 다이아몬드 스텝을 밟으면서 ‘꽃을 든 남자’를 부르는 선생님 모습을요.

다이아몬드 스텝이 거기서 나오다니요.

정말 분위기 짱이었어요!

낯선 곳에 가면 잠을 못 자는 불면증에 뒤척이면서도 흥겹게 춤추고 노래 부르는 선생님 모습이 계속 잔상으로 떠오르는 거예요. 그만큼 강렬했나 봅니다.

저 혼자 실없는 웃음 지으며 오지 않는 잠을 부르고 있었어요.

그때 본 선생님 모습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지요.


선생님의 유쾌한 모습 속에는 동시 작가로서의 천진난만한 순수함이 세상을 향해 살며시 열려있기 때문일 거예요. 일찍이 그 문을 닫아버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깨끗한 동심을 지켜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아요. 황폐한 대지 위로 홀로 남은 새싹의 용기와 지혜를 겸비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어린아이의 첫 마음을 간직하며 거친 험로 헤쳐온 이에게 하느님은 합격, 도장을 기꺼이 내어주시겠지요. 선생님의 화롯불 같은 열정이 만든 <하느님, 참 힘드시겠다> 동시집은 제13회 윤석중문학상(2019년)을 수상하게 되셨지요. “뒤늦게 축하드립니다!”

여기 선생님의 고결한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나무의 귀 김진광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새들의 수다를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는

  수많은 나무의 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노래인지,

  숲 속 오래된 전설인지, 해독이 어려운

  연신 똑같은 말을 하는 새들의 언어

  숲 속 나무의 푸른 귀들은 언제나

  귀를 팔랑거리며 재미있게 듣다가

  온 몸을 들썩들썩 흔들며 웃기도 한다

  어찌 친구인 새들의 언어를 모르겠는가

  가을이면 이야기로 가득 찬 무거운 귀를 내려놓고

  봄이 올 때쯤 연둣빛 새 귀를 가지에 매단다, 나무는

  새들이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파라솔과 나무의자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여기 앉아서 맘껏 이야기 해

  내 다 들어줄게 하는 나무의 마음 때문이다    


      

  감씨 김진광   

       

  감씨 속에는

  조그만 삽이 하나

  들어 있지. 

    

  봄철 씨앗이

  기지개를 켜고

  세상에 나올 때   

  

  고걸 들고

  영차영차

  흙을 파고 나오라고    

 

  하느님이

  조그만 삽 하나

  선물했지.      


         

겨우내 무거운 귀를 버린 나무들이 팔랑거리는 연둣빛 새 귀를 내밀고, 감씨에 든 조그만 삽이 영차영차 흙을 파내던 지난해 봄 저는 《시와소금》봄호에 시 ‘고드름’을 투고하였습니다. 호숫가 다리 난간에 매달린 쪼그만 아기 고드름을 발견하면서 지은 시였어요.

작아도 고드름은 고드름이기에 이른 아침 숫돌에 간 듯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고것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어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죠.

처음에는 휙 지나쳤다가 필름을 감듯이 걸음을 되돌려 다시 다가가서 지켜보았어요.

어떤 확고부동한 필살기 너마저 쨍그랑 햇빛과 마주치면 녹아내리겠구나, 돌덩이 냉가슴을 녹이는 건 온화한 관심, 사랑이겠구나.

저 칼날을 간 고드름이 이왕 떨어질 거면 혼탁한 생의 한복판 급소를 찌르며 떨어지면 좋겠구나. 

그리하여 고름이 튀면 시원하겠구나.

파멸의 끝자락 아쉬움 없겠구나. 


석 달 후 여름호에 선생님께선 -이 계절에 읽기 좋은 시- 코너에 제 시를 멋진 해설과 함께 추천해주셨어요. 

2019년 제 시집 <푸른발부비새 발자국>이 출간되었을 적에는 꽃다발 사진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해주셨죠. 생화 꽃다발을 받은 듯이 기뻤답니다.

삼복더위에 다시 꺼내 읽는 시 ‘고드름’은 냉장고에 얼려놓은 아이스바처럼 청량감을 주었어요. 고드름 칼자루를 손에 쥐고 뾰족한 아래부터 와삭와삭 씹어먹는 쾌감을 선사해주었어요.

선생님께 부족한 제 시를 추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렸죠.

이에 선생님은 삼척 쌍용양회가 배경으로 바라보이는 공원에서 동해 푸른 바닷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침 햇살이 스며든 유월의 찔레장미꽃을 찍어서 보내주셨어요.

“늘 좋은 시 즐겁게 쓰세요.^^” 말씀과 함께.


꽃이라곤 얼씬 안 하는 이 고독한 시간의 물결 위로 선생님 모습을 띄워봅니다.

지난해 여름 제 시 고드름을 해설하시던 선생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생을 소진하여 기력이 다해가던 선생님께선 영롱한 햇살에 닳아가는 고드름을 보면서 선생님의 운명을 생각하셨을 겁니다.

저는 그 마음 살피지도 못하였답니다.

삭풍 따라 떨어진 낙엽들이 무슨 사연을 전하듯 유리창에 쓸쓸하게 부딪히던 지난해 늦가을 선생님의 갑작스런 부음 소식을 듣고서 까마득하였습니다. 곤두박질하는 낙엽처럼 땅바닥이 치솟는 걸 느꼈어요. 어떻게 이리 황망히 떠나실 수 있을까.

제 곁에 다가와서 따스한 음성 들려주지도 않으셨는데, 그저 멀리서 문자 보내주시고 응원해주셨는데, 사람의 인연은 멀찍이 떨어져 비켜 가도 이렇게 아프다니요.

늑골을 조인 현이 움찔 떨리면서, 무거운 저음이 울고 있었어요.


제 고향과 산등성이 하나로 이어져 아름다운 장호 용화 해변을 품은 삼척, 고향을 목전에 두고 언제나 스쳐 지나가기 바빴답니다. 그곳에 선생님이 계시다는 안도감을 이제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선생님의 아린 마음과 시선을 미처 읽지 못한 제 불찰을 용서하세요!

꽃눈들이 고운 실눈을 감춘 이곳과 달리 선생님이 계신 곳은 아름드리 꽃들이 만발하겠지요. 

오늘 천국의 향기 스민 복숭아꽃들이 봄바람에 날리는 꿈을 꾸었어요.

선생님, 잠시 스친 인연으로 제게 보내주신 애정 감사합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 남연우 드림.            




 고드름  / 남연우      

     

 호수를 건너는 다리 난간에

 위험한 시도가 매달렸다

 뛰어내릴까

 말까     


 밤새 고민한 흔적을 말해주듯

 신발을 벗어놓은

 발부리 끝이 뾰족하다 

    

 방울 방울지는

 투명한 펜촉으로 써 내려간

 유서를

 자필 서명, 햇살이 받아적는다

     

 쨍한 서릿발 눈빛

 송곳으로 후빈 아픔

 용서해달라   

  

 뛰어내린 그 자리에

 마르지 않은 눈물이 떨어진다   

  

 혼탁한 생의 한복판

 급소를 찌른

 얼음칼,     

 고름이 튀었다     


          

 ―《시와소금》2021년 봄호



▪시 읽기     

          

  이 시를 쓴 남연우 시인은 2017년 《시와소금》으로 등단한 신인이다. 추천한 「고드름」은 호수 다리 난간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고 자살을 시도한 사람을 떠올린 상상력이 돋보이는 참신한 작품이다.    

 

  사람들은 왜 자살을 시도할까? 옛날에는 가족들의 반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다음 세상을 약속하며 동반 자살을 하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도 있었다. 요즘 그런 건 거의 보이지 않고, 경제적, 정치적, 부정부패, 불륜 등의 이유로 자살을 택한다. 유서 내용은 간단하며, 끝부분에는 가족에게 먼저가 미안하다는 내용이 꼭 들어 있다.     


  시인은 난간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고, ‘위험한 시도가 매달려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뛰어내릴까/ 말까// 밤새 고민한 흔적을 말해주듯/ 신발을 벗어놓은/ 발부리 끝이 뾰족하다’고 표현한다. 호수 난간에 매달린 고드름을 자살을 시도하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했다. 그리고 자살을 할까, 용기를 내어 살아볼까, 고민한 흔적을 호수에 뛰어들기 전 신었던 신발을 벗어놓은 차가운 뾰족한 고드름의 맨발에서 찾는다.  

   

  발부리였던 고드름 끝이 방울 방울지는 투명한 ‘펜촉’으로 변신하여, 유서를 쓰고 자필 서명한 것을, 햇살이 받아적는다. 다시 햇살이 비추는 고드름의 눈빛은 ‘송곳으로 후빈 아픔’으로 은유적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용서를 해달라’고 사회, 가족 등 누군가에게 살면서 진 빚을 용서해 달라는 유서를 쓴다. 

    

  다시 뛰어내린 그 자리에 아직 마르지 않은 산자의 눈물이 보태지고,     


  시인은 시의 끝부분에서 혼탁한 삶 혹은 사회의 한복판 급소에 냉정한 얼음칼을 꽂는다. 얼음칼도 부서지며 생을 마감한다. (추천 김진광)     

     


―《시와소금》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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