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연우 Sep 08. 2022

서쪽으로 날아가는 너에게

네가 태어난 날은 만추였다.

추수가 막 끝난 들판은 온통 황금빛을 떨군 지푸라기 천지였지. 논바닥에 높다랗게 쌓인 짚단 위에서 트램펄린 점프하듯 해가 기우는 하늘 위로 껑충껑충 뛰어올랐어. 온 세상 땅과 하늘이 천진스러운 시골아이의 꿈과 웃음을, 응원해주었어. 뛰다가 넘어져도 가뿐히 감싸주는 짚더미는 폭신한 엄마 품 같았어. 옷자락에 머리카락에 지푸라기를 붙여가며 발바닥 스프링이 높이 높이 튕겨 오를 때였어.

저만치 누군가 뛰어와서 소리쳤어.


“엄마가 아기 낳았어.”

그 한마디에 방전된 아이는 재미난 놀이를 슬그머니 멈추었어.

그리고 집으로 줄행랑쳤어.


지금 우리 집에 아주아주 귀중한 선물을 하느님이 주고 가셨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나 봐.

안방으로 들어갔더니 엄마 옆에 조그만 아기가 누워있었어.

손가락을 말아쥔 아주 작은 손을 살그머니 만져보았어.

부서질 듯 보드라웠어.

이렇게 작고 예쁜 아기가 내 동생으로 태어나다니… 신기할 따름이었지.


육 남매 산파역을 도맡은 큰어머니는 약국에 다녀오라는 심부름과 함께 가는 길에 들판에 들러 아버지께 출산 소식을 알리라고 말씀하셨어.

아이는 더 빠르게 뛰었어. 신작로 중간쯤에서 왼쪽 길로 뛰어 내려갔어.

거기 들판에 아버지가 계셨어.

추수를 마친 볏짚을 갈쿠리로 긁어 태우시는 아버지 모습이 저녁연기 속에 희부옇게 보였어.

“아버지요, 아기 태어났어요.”

“아들이가, 딸이가?”

“딸요.”


땅거미 지는 들녘 연기도 마흔일곱 아버지 얼굴에 선명하게 떠오른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내리 딸 다섯 서운한 표정이라곤 안 보였다.

그때 내 나이 일곱 살이었다.

한 사람의 출생을 처음부터 지켜본다는 것은 벅찬 감동과 책임의식을 심어준다.

꼬맹이였음에도 내 무의식 저변에 언니 역할을 심어준 것도 막냇동생의 출생을 지켜본 그 가을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막냇동생을 아끼고 예뻐했다.

내가 육 학년일 때 동생은 노란 가방을 메고 유치원에 다녔다.

등원하기 전에 머리를 땋아서 묶고 단장해주었다.

어느 날은 디스코 머리를 땋아주고 어느 날은 방울을 달아서 갈래머리 묶어주었다.

동생이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등교 전 짬을 내어 동생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동생은 아버지의 눈을 쏙 빼닮아서 진한 쌍꺼풀에 커다란 눈을 가졌다.

가지런한 눈썹 둥근 이마 흰 피부 누가 봐도 이쁘게 생겼다.


동생이 아기였을 때 하교하고 집 마당에 들어서자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가방을 내던지고 창문을 여니까 아기가 안 보였다. 울음소리 들리는 그곳은 부엌 아궁이, 마루에서 떨어져 눈물범벅 얼굴에 잿가루를 묻혀 울고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울음소리로 보아 떨어진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기진맥진 “응애응애” 가녀린 소리였다.

안아 올려 살펴보니 다친 데는 없었다.

닦아주고 업어서 밭에 일하러 간 엄마를 찾으러 갔다.

“엄마, 아기가 부엌에 떨어져서 울고불고 난리 났어. 빨리 젖 줘.”

당시 집은 슬레이트 지붕에 동마루가 달린 작은 집이었다.

안마루와 부엌 높이는 1미터 남짓, 엄마가 밭일하러 간 사이 잠이 깬 아기는 엄마를 찾아서 기어 다니다 부엌으로 떨어졌다.


어느 날 엄마는 갓난아기를 밭가 옥수수 그늘에 뉘어놓고 김을 맸다.

엄마가 김을 매느라 어깨 펼 겨를이 없는 사이 아기는 포대기에서 벗어나 꼼지락거리다가 그만 논물에 빠지고 말았다. 깜짝 놀란 엄마가 뛰어가 살펴보니 거머리 한 마리가 아기 몸에 찰싹 붙어 있더란다. 식겁했단다.


동해 바다를 데운 뜨거운 태양이 초록색 기와지붕을 달구며 오후로 넘어가던 나른한 여름날이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서 여름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라디오 안테나를 높이 뽑아 올려서 지지직거리며 팝송을 내보내는 춘천 FM 채널을 듣고 있었다.

심심한 동생은 빗물받이 처마에 박아놓은 쇠기둥을 잡고 빙빙 돌고 있었다. 몇 바퀴 돌면서 원심력이 생겼는지 조금 빠르게 돌더니만 콰당 나가떨어졌다. 많이 울었다. 이마에서 피가 솟고 있었다. 옆이마가 깨졌다.

천 쪼가리를 눌러 지혈시켰다.

아버지께 급히 알렸다. 일찍 집에 오신 아버지는 아픈 동생을 병원에 데려가는 대신 제법 찢어진 상처 자리에 턱하니 된장을 한 숟갈 발랐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기겁할 노릇이었다. 얼마나 따가웠을까.

동생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똑똑했다. 전교 부회장 타이틀을 맡았다.

늦둥이 막내딸 덕분에 엄마는 학교에 오가는 학부모가 되었다.

내가 서울에 오고 나서 동생이 중학생일 때 부모님 슬하를 떠나 큰언니가 사는 대도시로 전학을 갔다.

떠날 수밖에 없는 사연은 애달프다.

애지중지 막내딸을 보내야만 하는 부모님도 동생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나는 동생이 서울로 진학하길 기다렸다. 내 바람대로 동생은 인 서울, 대학교로 진학하였다.

볼품없는 자취 살림을 살면서도 동생을 데리고 몸보신한다며 설렁탕 삼계탕을 사 먹었다. 그 동네에는 기가 막힌 빵 맛을 자랑하는 빵집이 있었다. 그 집 겉바속촉 감자빵과 모카빵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세월이 훌쩍 지나 그 동네 어귀를 찾아갔지만 사라지고 없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동생은 어느 날 사내 커플이 된 남자를 소개했다.

귀공자풍 밉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건이 탐탁지 않아서 면박을 주고 싶은데 미워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적어도 동생 마음고생은 시킬 것 같지 않았다.

두 선남선녀는 결혼하였다. 그리고 곧 수도권에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동생에게 첫아들이 태어날 무렵 제부는 갑자기 유럽으로 간다고 새벽 봉창 두드리는 소식을 전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나서 바로 채용됐다는 것이다. 제부가 먼저 가고 국내에서 아기 첫돌을 치른 동생도 떠나게 되었다.

부모님은 못내 서운해하셨다.

그렇게 떠난 지 햇수로 벌써 십 년이 되었다.


코로나로 삼 년 만에 귀국한 동생이 한 달 체류 일정을 마치고 오늘 출국하였다.

동생과 조카들을 태운 비행기가 유럽을 향해 날아오르던 그 시각 나는 배웅도 못 한 채 하늘만 쳐다보았다.

태풍이 지나가고 짙게 낀 아침 안개를 태양이 걷어내자 맑게 개었다.

가끔 비행기가 떠가는 높고 새파란 하늘을 혹여 동생이 지나갈까 내다보았다.

잠잠하다. 새 한 마리 날아가지 않는다.

이륙이 지연되는 걸까.

하늘을 보고 외쳤다.

“옥아, 잘 가. 무사히 날아가렴.”

아무렇지 않던 눈가에 파고가 일면서 눈물이 맺혔다.

공항으로 배웅 안 간 자신을 질책하였다.

집으로 찾아온 동생에게 맛있는 집밥을 먹이고 좋아하는 브랜드 블라우스를 사 보내며 내 마음을 다 표현한 줄 알았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집으로 동생이 가는 쪽은 서쪽이란 걸 오후가 지나가면서 알았다. 나는 내 기준 동쪽 하늘을 쳐다보았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 동생은 해마다 봄이 되면 날아왔었다.

그 모습이 제비 같았다.

동생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놓았다는 소식을 전하면 고향 집에도 제비가 날아와 주었다.

이번 방문 때 동생은 고향에서 짧은 일정을 보내게 되었다.

원래 귀국 날짜를 잡아놓은 그 무렵 코로나에 걸려서 일정이 뒤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동생은 고향 집 정리정돈을 말끔히 하였다고 한다.

자리 차지하는 침대를 치우고 흩어진 잡동사니들을 수납장을 마련 집어넣어 훤해졌다는데, 동생이 떠나던 날 엄마도 울고 동생도 울었다고 한다.

장담하기 어려운 노부모와 떨어질 때 그 발걸음 무거워 어찌 뗐을까.


제철 식재료 넘쳐나는 맛있는 한식 먹으면서 내 나라 내 집에서 등 뜨시고 배부르게 살면 안 되나?

일조량이 줄어들어 어두침침한 동절기 빵 뜯어 먹으며 눈동자 푸른 사람들이 사는 그 나라에서 외롭게 살아갈 동생이 안쓰럽다. 동생을 멀리 데려간 잘생긴 제부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하는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가는 운명인가 보다.

애교 많은 동생은 부모님께 자주 전화해서 “엄마, 사랑해.” 애정 표현도 잘한다.

우리 집 늦둥이로 태어나서 사랑 많이 받고는 머나먼 유럽에서 살아가는 내 동생.

동생이 다시 떠나고 나서 알았다.

내 마음이 왜 아픈지. 동생의 출생과 성장을 지켜본 언니여서 마음이 아픈 거였다.


구글 어스를 돌리며 동생의 항로를 따라가 본다.

이렇게 멀리서 왔었구나. 그 길을 다시 돌아가고 있구나.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에게 옷과 음식을 나눠주었다는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자, 자원봉사자가 되었다는 동생. 옥아, 지구 반대편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네 집을 찾아가는구나.

네가 있는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란 걸 잊지 마. 좋은 거 있음 네가 먹고 입어. 애들 치장만 하지 말고.

여자는 나이 들어도 얼굴이 남는다더라. 네 피부가 좀 상한 것 같아서 마음 쓰여. 면세점 좋은 화장품 사서 발라. 네가 행복하면 그게 효도하는 거란다. 언제 어디서나 활짝 웃는 네 얼굴 보기 좋더라. 스마일 주름만 빼면. 살살 웃어~~

“옥아, 건강하게 잘 지내!”                







    


















매거진의 이전글 Mar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