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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12. 2023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

그저 매화를 볼 수 있으면 다행이라 여기고

길을 나섰다.

조팝나무에 앙증맞은 새잎이 송글송글 돋아남을 보았고

올해 첫 풀꽃, 봄까치꽃이 바위에 기대어 파란 쪽창을 열어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산 아래 수목원은 우중충했다.

평지보다 기온이 더 낮다.

산수유도 아직 엷은 빛깔, 꽃망울을 움켜쥐고서 개화를 기다리는 눈치이다.

너무 성급하게 찾아왔나?

지난가을 낙엽을 버리지 못한 활엽수들이 해지고 거추장스러운 넝마조각을 

걸치고 있다.

연두색 생명의 빛이라곤 안 보인다.


춘삼월도 열흘이 지났건만...

새들이 조용한 이유를 알겠다.

매화 향을 머금은 남쪽으로 날아갔나 보다.

새들도 권태로운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목소리를 잠근 채 침묵하고 있다.


실내 화원으로 가려는데 낙엽 더미에 엎드린 사람들이 보인다.

무슨 미묘한 소동이 일어났나 보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봄을 알아차리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무조건 무릎을 구부려야 한다.

드낮은 땅과 한몸이 되어 절을 하듯이 자세를 낮추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살가운 봄은 겸손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먼저 찾아온다.

사랑이 머문 눈가에 먼저 살며시 다가온다.



"봄은 왜 야생화들을 먼저 깨우는가?"


야생화 같은 사람이 있다.

학교라는 의무교육 기관에서 똑같이 암기하고 주입식 교육을 받더라도

자신의 개성을 말살당하지 않는

창의적인 사람이 있다.

그들은 틀에 박힌 사고를 싫어한다.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팽창과 수축을 넘실거린다.

한없이 작고 작아져 동굴 속에 기거하다가도

마음이 탁 트이는 날에는

태평양을 횡단하고

우주에 떠도는 별빛을 수집한다.

그에게선 언제나 향기가 난다.


조향사들이 사치스러운 유리병에 담아낼 수 없는

향이 우러난다.

향기란, 참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가치

말하지 않아도 스며드는 느낌

고운 눈빛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좋은 생각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오늘 내일 저 너머 닿을 수 없는 구원의 세계


기나긴 겨울이 멀어져 갈 때

고통과 시련이 끝나고 눈물이 한 방울 맺히려 할 때

봄이 막 잉태될 무렵

신은, 다정스러운 손길로 가장 아픈 영혼을 가장 아름답게 위로한다.

그로써 모든 슬픔이 잦아든다.

봄기운을 빨아들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황홀한 야생화들 물들인다.

거기 다다른 내 발걸음이 숨죽인다.

너무 행복하다.


단추를 매단 실처럼 가느다란 줄기

끊어질까 위태위태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이며 파르르 흔들리는 꽃!

저만치서 걸어오는 님을 향해 골목어귀 

자그만 꽃등불 환히 밝히고서

어둠을 물리친다.

추위를 다스린다.

성에 낀 단칸방 유리창에 한 여자가 산다.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다.

고집이 세다.

외로움을 마시는 찻잔을 아무하고나 기울이지 않는다.

혼자서 홀짝거린다.

먹다 남은 빵 부스러기를 창틀에 매단 새들 밥그릇에 주는 걸 좋아한다.

발목은 짱짱한데 구멍 난 양말을 햇빛과 함께 깁는 걸 좋아한다.

요즘 누가 이런 걸 신느냐고 가족 어느 누구도 타박하지 않는다.

개성적이라며 좋아한다.

첫인상은 새침하고 차가워 보여 말 붙이기가 쉽지 않다.

몇 번 말을 걸면 금세 웃는다.

속마음이 깊다.

그녀는 개똥철학을 글로 쓰는 작가이다.

어렵다는 시도 끄적거린다.

도시를 싫어하지만 보도블록에 뿌리를 비집고 내린 제비꽃처럼

어쩔 수 없이 살아간다.

그녀의 집은 소나무 아래 있다.


며칠 전 관리사무소에서 임의로 소나무 우듬지 전지작업을 강행함을 못마땅해한다.

푸른 그늘을 잃어버린 숏컷 나무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항의해야 하는지

어떻게 이겨낸 겨울인데

이제 곧 당도할 봄인데

새순을 틔워 가지를 뻗어봐야 또 몇 년 지나 잘려버릴 텐데

삶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무도한 저들의 행위를 규탄한다.

희뿌연 도시에 갇힌 야생화는 자신이 태어난 바닷가를 그리워한다.

갯바위를 두드리는 동해안 파도소리를 귓가에 리플레이한다.

언 땅을 뚫고 나온 복수초, 설강화, 노루귀, 깽깽이풀이 응원한다.

2023년 그녀의 삶을!






봄빛을 닮은 복수초


1월 1일 탄생화, 설강화(snow drop) 갈란투스(galanthus)

에덴동산 신화에 따르면, 이브가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지구는 불모지에다 눈이 끊임없이 내립니다. 하염없이 울고 있는 이브에게 천사가 다가와서 위로합니다. 천사가 눈송이 하나를 잡아서 숨결을 불어넣자 생명을 얻은 새하얀 꽃이 피어납니다. 그 꽃이 설강화라고 해요. 꽃말은 희망, 부활.



노루귀


깽깽이풀, 이 어여쁜 야생화들을 하마터면 놓칠뻔했다 갈림길에 이르러 으슥한 산비탈 낙엽더미 길이 왠지 끌렸다 온통 갈빛 그속에서 산뜻한 빛깔이 어른댔다 고운 야생화들이었다 


이 아름답고 눈물겨운 야생화들을 아무런 감탄없이 그저 스쳐 지나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한눈에 봐도 옷을 잘 차려입은 그들이 지나가며 짙은 향수 냄새를 풍깁니다. 작고 섬세한 아름다움에 무릎을 구부리지 않는 자들이 세상 누구에게 허리를 굽히고 살아갈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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