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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26. 2023

도시 농부 직함

걸어서 7분 거리 텃밭에 취직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첫 출근하러 가는 날 미세먼지가 말끔히 걷히었다.

추리닝 바지에 애들 입던 잠바 때 묻은 운동화 차광모자를 썼다. 이런 차림으로는 쓰레기를 버리러 간 적도 없던 내가 이런 차림을 하고 집 앞 소공원으로 걷는다. 왠지 편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 기분 때마침 흔들리며 피는 벚꽃처럼 신난다. 그간 얼마나 격식에 얽매이며 살아왔던가. 바깥으로 나갈 때는 최소한 이 정도는 입어줘야 된다고 규정지었던 틀이 우지직- 부서진다. 통쾌하다.


하나의 틀을 파괴하며 걷는 길은, 환상적이다.

푸른 하늘을 떠받친 언덕배기 소나무 아래 벚꽃들이 불과 한 달여 전 겨울 눈꽃처럼 새하얗게 피었다. 2주 앞당겨진 봄꽃 개화기 목련은 순백의 블라우스를 막 갈아입었고 땅바닥에는 자수정을 박아놓은 듯 보라색 제비꽃들이 오종종 눈부시게 반짝인다. 자연으로 취직한 나의 출근길을 축하해준다.


종묘상에 들러 모종을 미리 사두었다. 상추 흑상추 청상추 적치커리 쌈케일 모종 그리고 열무 얼갈이씨를 샀다. 나는 얘네들을 맨땅에 헤딩하기 싫었다. 보아하니 텃밭 이웃들은 검정 비닐을 씌웠다. 이걸 멀칭이라고 하는데 그 효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토양의 수분 증발 억제, 양분 손실 방지, 지온 급변 완화, 잡초 발생 억제, 이화학적 성질 개선, 거친 비가 지나간 후 토양소실 방지... 이 좋은 걸 마다하면 고스란히 수고로운 손길을 요구하게 된다. 모종을 키우기도 힘이 들 테고.


남편은 그냥 심자고 한다.

"아니야, 비닐을 씌우고 싶어."

의견이 팽팽히 대립한다. 농사는 내가 한 수 위다.

직함도 만들었다. 나는 풍뎅이 텃밭 회장, 남편은 풍뎅이 텃밭 사장.

그러니까 사장은 회장 말을 들어야 한다.

"내일 아침 기온이 0℃ 떨어지는데 비닐을 덮으면 이불을 덮어주는 거라서 덜 추울 거야."

종묘상에 다시 가서 비닐을 샀다.


기다란 직사각형 터전 두 군데 비닐을 덮었다.

봄바람이 분다. 비닐 깃발이 펄럭거린다. 얌전하게 흙으로 눌러준다.

꽃삽으로 비닐을 십자형 흠집 내고 흙을 파낸 뒤 모종을 자리 잡아 넣고서 흙으로 다시 덮어준다.

첫 번째 줄 다섯 포기를 심을 때는 어색했다. 손이 흙을 알아차리는 데는 불과 십여 분.

아, 내 손은 금세 부드러운 흙을 알아차렸다. 적당한 깊이와 덮어주는 두께까지 손놀림이 익숙해졌다.

칠십 포기 모종을 심는 손길이 아기를 다루듯이 살살... 비닐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

다 심고 나서는 물을 흠뻑 뿌려주었다.

"잘 자라거라."


맨땅에 줄을 그어 홈을 파고 열무씨 얼갈이씨를 솔솔 뿌렸다.

까치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편평하니 덮어주었다.

이 일대에는 까치들이 무리 지어 산다. 씨를 뿌리면 용케 알고 쪼아 먹는다는데 두고 볼 일이다.

텃밭 바로 옆에는 대형 교회가 서 있다. 찬송가를 부르는 음악 소리가 들린다.

식물도 음악을 틀어주면 더 잘 자라고 좋아한다는 얘길 들었다.

잘 되었다. 심심하지 않게 음악 소리도 들리고 텃밭 가에는 실시간 봄소식을 타전하는 능수버들이 연둣빛 늘어뜨린 새움 가지들을 살랑살랑 일렁이며 웨이브 탄다. 봄바람을 좀 더 부드럽게 달래준다.

버들잎이 쓸어주는 바람이 어린 모종들을 쓰다듬어 줄 것이다.


시계를 보니 1시 반, 점심때가 되었다.

작업을 마치고 큰길로 나오는데 건너 건너 텃밭에 농장주 할아버지가 의자를 놓고 앉아 계신다.

내 또래 부부가 일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고 계신다.

처음 분양받고 느꼈던 그 모습 그대로 관리 감독하는 모습이다.

농장주가 소작농을 부리는 모습 같다.

혹 의자를 옮겨서 우리 밭으로 오면 어떡하나, 조바심이 난다.

평일에는 할아버지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상추 아기들 물을 주러 주중에 한 번은 와야 하는데 할아버지는 텃밭 여러 군데 자신의 거처를 마련해 두었다.

비닐하우스는 집이요, 텃밭 중간에 농막이 있고, 의자를 옮겨 다니니 웬만해서는 할아버지 눈길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뵈면 인사나 고분고분 잘 드리자.


안 하던 일을 했더니 배가 고프다.

이미 사탕을 한 알 물었다.

바로 근처에 유명한 짬뽕 맛집이 있다.

대기 번호를 받았다, 22번. 딸내미를 시켜서 웨이팅 30분을 채우고 앉았다.

이 집 짬뽕은 국물맛이 끝내준다.

아주 진하고 국산 고춧가루를 넣어서 개운하다.

깐 바지락조개, 오징어살, 가늘게 썬 돼지 살코기 소량, 불맛 나게 볶은 배추, 새파란 부추를 얹어서 통깨를 뿌려준다. 특히 먹구름이 끼면서 비가 내리는 날에는 더 감칠맛 난다.

흰 찹쌀가루를 입어 바삭하게 부푼 탕수육도 일품이다.

텃밭에 새로 취직한 일꾼 둘이서 회식하는 기분 탓인가. 꿀맛이다.


일을 하고도 고되지 않다.

창 밖 풍경으로만 바라보던 태양과 바람, 비. 이제부터는 피부로 체감하게 될 것이다.

유리창을 열고서 손을 내밀어 내리쬐는 햇빛이 뜨거운지 시원한지 내리는 빗방울이 거센지 부드러운지 바람결 또한 내 손의 감각을 통하게 되리라. 이게 농부의 마음인가.

버리려고 모아둔 옷들을 회수했다. 허름하게 입은 도시농부는 촌스럽게 생긴 시퍼런 물뿌리개 통을 들고서 공원길을 걸어간다. 아니다. 아직은 부끄럽다. 그래서 물통을 차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당분간은 차를 타고서 물을 주러 가야겠다. 아무도 모르게 살짝 다녀와야겠다.






파란 돌멩이 같은 열무씨 새싹아, 곱게 돋아나라!
이 공원길을 걸어서 텃밭으로 출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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