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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r 31. 2023

생기와 시듦

강남역에서 고향 친구를 만났다. 

삼 년 만에 만나서 친구가 대뜸 하는 말 "너는 아직 생기가 있다."

"너는 그럼 생기가 없냐?"

서로 웃고 말았다.

골목 청국장 식당에서 뚝배기 계란찜을 첫 숟가락 떠 넣었더니 역겨운 수돗물 냄새가 올라왔다. 먹는 둥 마는 둥 밥이 입에 붙질 않았다.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영 시장기가 느껴진다. 춥고 배고팠다. 


다음날 외출복 차림으로 볼일을 보고 밭으로 차를 몰았다. 트렁크에서 물뿌리개를 꺼내 들고 그새 얼마나 자랐나 기대 반 걱정 반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겼다. 웬걸, 며칠 지났다고 시들시들하다. 모종을 심은 지 나흘째 방치된 상추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물 주면 된대서 주중에 온 건데 아차 싶었다.


친구를 만나러 가던 날 상추를 돌봐주었어야 했다. 

마음 같아선 심고 나서 매일 들여다보고 싶었다. 공동체 텃밭이고 주인장이 늘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하다 보니 쉽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물 주는 공식을 되뇌며 애써 안 갔다. 그 결과 이렇게 시들어가는 상추들의 몰골을 마주하고 말았다. 마음이 안 좋다. 젖먹이 배 곯린 것처럼.


살구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물통에서 물을 한가득 펐다. 미안해하며 물을 뿌려주었다. 입술이 타들어가는 상추들의 잎사귀에 물을 흠뻑 떠먹여 주었다. 한 구역 다 뿌려주고 두 번째 구역에 뿌려주다 보니 상추 포기 세 군데가 비어있었다. 흙이 파헤쳐져 있고 붉은 상추 세 포기가 사라졌다. 그 자리 구멍이 뻥 뚫렸다. 남편에게 자초지종 전화를 했다. 


건너편에서 일을 하던 아저씨가 다가왔다. 저번에 퇴비를 번쩍 들어다주셨던 그분이다. 상황을 살펴보더니 "이거 사람이 그랬구만. 이런 적 없었는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누가 봐도 사람 손목이 냉큼 뽑아간 흔적이다. 같이 농사짓는 사람으로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비닐을 덮고 포기당 15cm 눈대중으로 간격을 벌려가며 가지런히 심었더니 12 포기가 모자랐다. 종묘상에 두 번 가서 모종을 사와서 빈자리 메우고 심었는데 이런 해코지를 당했다.


주변에 새로이 심은 상추밭 붉은 상추들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저기 옮겨 심은 건 아니겠지. 멀쩡히 심어놓은 상추가 어디로 뽑혀갔단 말인가. 아저씨는 우리 밭에 응급 소생술을 시행했다. 손가락을 찔러서 흙을 파 보시더니 안에는 이렇게 흙이 다 말라있다며 물뿌리개 분사캡을 열고 댐 수문을 열듯 물을 콸콸 비닐 구멍 안으로 쏟아부었다. 



지난 주말 모종을 처음 심고 나서 바가지로 줘야 될 물을 한 종지 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나흘을 굶겼던 거였다. 이래놓고 농사를 짓겠다고 땅을 빌리고 농군 행세를 했는지 자괴감이 든다. 우리 상추들이 싱싱했다면 못된 손이 훔쳐갔을까? 싱싱한 상추들은 밭주인의 부지런함과 기개를 말해준다. 꼴이 우스우니 무시를 당한 것 같았다. 잠자고 있던 승부근성이 발동한다. 나라는 사람은 남에게 지는 걸 싫어하는 승부근성이 발달한 편이다. 


두고 봐라. 저 푸른 초원을 내 반드시 만들어내고야 말리라. 

이젠 의자를 옮겨 다니며 감독하는 주인 할아버지도 무서워하지 않겠다. 

푸릇푸릇 키워서 남부럽지 않게 한 소쿠리 가득 수확물을 담아서 내 부엌으로 자랑스럽게 가져오겠다. 꽃잎이 둥둥 뜬 물을 체하지 않게 받아마신 상추들을 아삭아삭 맛있게 키워서 아이들에게 내보이겠다. 


농막에 앉아계시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저희 밭 모종 세 포기가 사라졌어요."

"그거 까치 소행이여. 지렁이 파먹느라고 그러잖어."

"까치가 상추를 먹어요?"

"아니. 모종 파갔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들고 다니기 귀찮은 시퍼런 물통도 밭둑에 놔두면 잃어버릴 게 뻔하다.

선량한 농심은 어디로 가고 흙을 일구는 밭뙈기조차 믿지 못할 세상이 되었다.

울타리를 세워서 동일 시간대 출퇴근 카드를 찍고 출입하는 주말농장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니면 cctv를 달던가. 시간이 흘러 풍성한 수확물이 열리면 그때는? 어차피 나눠먹을 거 따 가라면 따 가라지.


이 봄 이십 년 넘게 우리와 동고동락하던 화초를 구석에서 창가 가운데 자리로 옮겨주었다. 나는 '덕구리난' 화초를 십 년 동안 학대하였다. 벽에 가로막혀 볕이 잘 들지 않는 구석에 밀어 두고 물은 생각나면 한 번 주면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덕구리난은 형태가 특이하다. 줄기 아랫부분이 반원형 둥글게 똬리 틀어 앉아있고, 잎은 분수처럼 사방팔방 가늘고 길게 뻗어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원형 몸체가 점점 커지면서 화분이 비좁아지자 생장속도를 늦추고 싶었다. 그래서 물도 덜 주고 만지면 까끌까끌한 촉감 또한 거부감이 들어서 가까이 다가감을 꺼렸다. 


지난해부터 활기를 잃기 시작하더니 잎이 축축 처진다. 이 봄 환한 햇살 한 자락을 유난히 갈구하는 덕구리난의 초라한 몸짓을 보았던 걸까. 낑낑대며 잡아당겨 햇살이 널린 창가로 옮겨주었다. 장발을 단발머리로 잘라주었다. 물도 골고루 먹였다. 조금씩 생기가 도는 듯하다. 그간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무관심과 한뎃바람을 참아가며 살아온 네게도 미안하다, 미안해.



식물도 스트레스 받으면 소리 낸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스라엘 연구팀이 식물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 사람에게는 안 들리는 고주파로 자기 상황을 알린다고 한다. 연구팀은 음향 박스에 5일간 물을 주지 않거나 줄기를 자르는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줘 온전한 식물과 비교하였다. 그 결과 식물들은 40~80kHz의 고주파 소리를 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최대 주파수는 약 16kHz다.


그 소리는 '딸깍'하는 소리나 포장용 '뽁뽁이' 에어캡 터지는 소리와 유사하다고 한다.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자꾸 텃밭 상추들에 신경이 쓰인 것도 귀에 거슬리는 음향을 감지하였기 때문인지 모른다. 생기와 시듦의 한 끗 차이는 무엇일까. 관심을 주는 빈도와 어디가 불편하진 않은지 살펴보는 세심함일 것이다. 관심의 또 다른 이름 사랑인 것이다. 부드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얘기를 나누고 안색을 헤아리는 마음, 결국 사랑이 부족했다. 


내 마음 케어하기도 벅찬 날이 있다. 그걸 핑계로 내 가족에게 보살핌을 게을리하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엄마라는 이유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하기란 힘들다. 힘든 내 마음은 누가 살펴주나? 누가 알아주나?

어디 하소연할 데라도 있던가? 언제나 강함을 요구받고 그에 못 미치면 강하게 질책당하면서 강함, 강함...

나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떠받치는 철근이 아니다. 바람 불면 휘어지는 대나무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자신의 중심을 지킨다. 또 한 번 강풍주의보가 발효될 예정이다. 심호흡하면서 내 그릇에 대하여 내 능력에 대하여 최선을 다할 일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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