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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Apr 30. 2023

지평선을 열어주는 흙

봄비가 여러 번 지나갔다. 인색하지 않게 흠뻑 적시며 지나갔다.

내가 물을 뿌려준 횟수는 고작 서너 번.

빗물이 골고루 뿌려준 덕분에 텃밭 상추는 어느새 뿌리를 내렸다.

지난주 모종을 심은 지 한 달여 만에 수확의 기쁨을 누렸다.


적상추 청상추 흑상추 적치커리 쌈케일 두루두루 잘 자라고 있다. 그중에서 흑상추가 빨리 자라는 중이다. 발돋움하며 풍성한 자태로 몸집을 키운다. 텃밭에는 또다시 속상한 일이 발생했다. 누군가 가장자리 쌈케일 한 포기 잎을 죄다 뜯어놓았다. 부러뜨려서 꺾인 잎, 뜯겨서 버려놓은 잎. 괘씸했다. 먹으려거든 키워서나 뜯어가지 아무도 먹지 못하게 싹둑 목숨을 꺾어버리다니...


처음 분양받던 날 일면식 없는 어떤 여자가 같이 분양받으면서 날 째려보던 눈길이 떠오른다. 짙은 아이라인을 긋고 교양을 좀 먹은 얼굴인데 눈독이 들어있었다. 그 여자가 왜? 내가 꼬박꼬박 어르신이라고 불렀던 농장주 할아버지의 실제 나이는 예순 살이라는 사실도 건너 텃밭 이웃을 통해 새로이 알아냈다. 사람 얼굴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무려 십 년 이상 나이 들어 보인다. 아무튼 그 누군가의 악행은 내 브런치를 통해 만천하 드러나고 있음을 명심하시길!


오늘 두 번째 상추 수확을 거두었다. 일주일 만에 상추들은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여러 쌈채소 중에 나는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면서 도톰하고 부드러운 쌈케일과 달고 쌉싸름한 즙을 내주는 아삭한 적상추를 좋아한다. 쌈케일이 얼마나 자랐나 살펴보는데 연푸른 잎 몇 장이 숭숭 구멍 뚫려있었다. 어머나 나랑 식성이 비슷한 초록색 벌레 두 마리가 그새 통통하게 자라서 케일을 사각사각 갉아먹고 있었다.


나랑 아무 상관없는 나뭇잎에 붙은 벌레였다면 기겁했을 텐데 내가 키우는 채소에 달라붙어서 그나마 덜 징그럽다. 나무 꼬챙이로 빨리 떼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남편은 그걸 기어코 맨손으로 붙잡는다. 혹 나한테 겁 주려고 던질까 봐 멀찍이 달아났다. 두 번씩이나. 놈은 두 마리니까.



불쑥 손대면 부러질까 아기 다루듯이 살살 좌우로 잡아당기면 상추들은 "톡" 소리 내며 뜯긴다. 흰 점액이 묻어나는 그 작은 소리는 쾌감을 자극한다. 누런 종이 쇼핑백 가득 수북이 채운 상추들은 종류별 나누어 담아서 냉장 보관하면 일주일 양식이 된다. 새벽 배송 신선 배송 그 어떤 광고도 텃밭에서 갓 따온 신선도를 앞설 수는 없다. 텃밭 총알배송 물기 털고 싸 먹는 상추 식감은 그냥 몸이 건강해지는 맛. 몸은 고된데 엔도르핀을 유발하는 행복한 상추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형식적으로 인사하는 앞집 초인종을 누르고 나누어드렸다. "이거 텃밭 농사지은 건데 드셔보세요."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내밀었다. 내 손으로 지은 상추들은 없는 용기도 나게 해준다.



새싹이 쑥쑥 자라나서 잔뜩 기대를 모았던 열무 얼갈이는 모양새가 영 비실비실하다. 바람을 통과하는 플래카드 모양 온통 펀치가 뚫렸다. 빽빽한 밀집도가 부담스러워 헐겁게 숨을 쉬려고 그러는지 한결같은 모양새다. 고개 숙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주 작은 검은색 날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열무가 얼마나 맛있으면 단번에 알아보고 어린 이파리를 뜯어먹으려고 아우성인 걸까. 이래서는 내 입에 넣기 부적격이다.


그렇다고 친환경 텃밭에 살충제를 뿌릴 수는 없다. 벌레를 죽이자고 독한 약을 살포하면 내 몸도 아프게 된다. 바람 타고 날아간 성분은 상추밭을 망치고 말 것이다. 친환경 살충제를 검색해 보았다. 막걸리 물 사카린을 섞어 만들면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적당히 기분 좋게 만드는 달달한 막걸리를 소량 분사하면 이 조그만 벌레들에게는 사량이 되나 보다. 막걸리 두 병을 사서 한 병은 남편과 나눠 마시고 한 병은 벌레 퇴치제로 사용했다.


효과는 단박에 나타났다. 분무하고 다음날 갔더니 벌레들이 모두 어딘가로 날아가고 사라졌다. 초췌한 몰골 열무 얼갈이, 과연 싱싱하고 탄력 있는 피부로 되살아날까. 봄비와 따사로운 햇볕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싱그러운 초록색 피부로 재생해 주길 간절히 바라며 막걸리를 고사 지내듯 칙- 칙- 뿌려준다.



절반 이상 백지로 비워둔 풍뎅이 텃밭은 제일 불량한 과제 미이행 상태이다. 텃밭 이웃들은 한 치 땅도 놀리지 않고 빼곡히 심어두었다. 사실 지금 심어놓은 상추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남는데 무엇하러 욕심을 부리겠나. 시기별 심는 파종시기를 기다린 것뿐. 눈치 빠른 잡초들이 여백의 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지팡이 만드는 명아주들이 파릇파릇 내려앉더니 이랑 사이로 붉은 아기단풍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고구마 심을 비닐을 씌울 건데 뽑아내지 않으면 질식할 것이다. 얌전하게 공터로 모셔 심어주었다.


희뿌연 연무와 함께 일시적 저온현상이 나타나는 입하를 일주일 가량 앞둔 이 시점 여백을 채우려고 한다. 본격적으로 키를 키우는 여름을 앞두고 요즘 출하되는 모종들은 키가 큰 채소들이다. 탄저병에 강한 품종이라는 고추 모종 다섯 포기, 대추 방울토마토 다섯 포기, 찰토마토 다섯 포기, 가지 다섯 포기, 옥수수 열 포기를 심었다. 키가 껑충 자라는 토마토 모종 옆에는 여름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지지대를 세워주었다.



이로써 풍뎅이 텃밭은 여백이 완성되었다. 이제 다음 휴일에 고구마 모종만 심으면 불량 농부는 면하게 된다.

아직은 미온적인 볕을 머리에 인 채 두어 시간 일했더니 힘들다. 텃밭과 교회 사이에 서있는 감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새참을 먹는다. 쫄깃한 쑥절편, 고소한 콩가루 입은 인절미를 먹고 있자니 저 건너 까치들이 설레발친다. 까르르 까꿍 수작 부리는 개구리들 목소리도 슬몃 들린다.


아무리 낙원 같은 집도 때로는 감옥이 되어 사람을 가둔다. 그 철창을 넘어서 불과 7분 거리 바깥으로 나온 것뿐인데 이토록 태평한 전원이 펼쳐져 있고 나는 그 땅을 개간하는 테스가 되어 있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 긴 치맛자락을 끌며 석양에 잠긴 밀밭 지푸라기에 파묻혀 일하는 그녀는 아닐지라도 원초적인 생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흙을 만진다는 사실은 타향을 떠돌며 방황하는 내 무의식에 뭔가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줄 것만 같다.



일주일만 지나면 성큼성큼 자라나는 상추들이 진짜 농부를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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