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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y 09. 2023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

도시농부는 패션에 신경을 쓴다. 밭에 일하러 간다고 해서 몸뻬바지 차려입은 촌부가 될 수는 없다. 취미로 키우는 채소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하면 이상하려나. 늘 취해온 자기만족이라고 해두자. 연한 풀색 바지랑 청재킷 또는 블랙 카고바지랑 아이보리 면남방에 인디언핑크 볼캡을 쓰고서 채소들을 만나러 간다.


이틀간 내린 비는 밭고랑을 한강수로 만들어놓았다. 질퍽한 강물이 괴어있었다. 어떡하나. 양손에 연장과 고구마순을 담은 가방을 한가득 들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난감하다. 종묘상에 먼저 들렀다가 오는 길이라서 밭 사정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다. 


앞으로 장맛비가 내리면 어떠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나의 패션코드에 한 번도 신어본 적 없는 장화를 장착하게 생겼다.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장화만 있으면 이리 첨벙 저리 첨벙 문제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어떻게든 저 강을 건너야만 한다. 운동화를 신고서 말이다. 


왼편으로 아직 분양되지 않은 빈 땅이 보인다. 손길이 닿지 않아서 억세게 돋아난 잡초들이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정도껏 디뎌보자. 한 발 두 발 세 발, 아악! 왼발이 쑥 들어갔다. 깊이를 모르고 질퍽 빨려 들어갔다. 빼려는데 뭔가 묵직하게 잡아당기는 느낌.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기우뚱하면서 얼떨결에 뺐더니 양쪽 운동화는 진흙투성이. 머드 목욕한 발목이 되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맘 놓고 일할 수 있겠다. 더 망가질 게 뭐 있나. 진흙 튀긴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늪지대에 서 있으니 이웃 텃밭 무성하게 자라난 감자이파리들이 득시글거리는 초록색 악어처럼 보인다. 



초보 농사꾼은 고작 이틀 빗물이 훑고 지나간 밭의 지질학적 변화를 가볍게 보는 우를 범하고야 말았다. 이제부턴 저 질척거리는 고랑에 발을 디디고 서서 고구마를 심어야만 한다. 밤고구마도 호박고구마도 아닌 꿀고구마라는데…


고구마순을 심는 연장도 새로 샀다. V자형 홈이 파진 기다란 조각도처럼 생겼다. 순을 끼워서 미리 덮어놓은 검정 비닐을 비스듬히 콕콕 찔러 넣었다. 고구마순은 게눈 감추듯 쏙쏙 파묻혔다. 이랑 세 마디를 손쉽게 끝내고 보니 비닐을 묻은 고랑이 난잡한 발자국으로 어지러웠다. 파묻은 비닐이 속살을 헤집고 드러난 뼈처럼 비닐 장판 아래 숨겨둔 비자금처럼 들켜버렸다. 



땅이 굳으면 다시 흙을 메워 줘야 한다. 나는 한입에 쏙 들어가는 꼬마 고구마를 좋아한다. 자주색 이쁜 껍질을 벗기는 재미도 있고 노란 꿀맛 작은 고구마가 더 감칠맛 있다. 그래서 심는 간격도 촘촘히 심었다. 그러면 작은 고구마들이 옹기종기 생긴다고 한다. 


햇고구마 수확철은 가을 운동회와 맞물려서 언제나 설레게 만들었다. 엄마가 그해 처음 캔 고구마를 쪄서 찬합에 담아오면 밥을 먹고 나서 꿀맛같이 먹었다. 단맛에 굶주린 시골 아이에게 고구마는 천상의 맛. 긴긴 겨울밤 벽장 종이상자에서 갓 꺼낸 고구마를 깎아서 먹는 맛은 시원하고 달달한 위로가 돼주었다. 담백한 감자보다 고구마(sweet potato)에 더 손이 가는 건 부드럽고 달콤한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여 내어주기 때문이다.

 

진흙에 튀겨가며 흠뻑 빠져가며 고구마를 내 손으로 심은 5월은 풍요로운 가을로 직행하기에 뿌듯하다. 한 달 남짓 텃밭을 가꾸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다. ‘봄은 수확의 계절이다.’ 치열한 무더위를 통과한 가을만이 결실을 내어주는 절차가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춥고 고독한 겨울을 잘 이겨내면 바로 거둬들이는 봄은 춘수(春收)의 계절이다. 모종을 심은 지 한 달 만에 일주일이 멀다 하고 내 품 가득히 안겨주는 상추들이, 씨를 뿌린 열무가 어느덧 거둘 때라며 초록 정글을 만들어 통통한 달팽이를 키우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 



인고의 눈물을 흘리며 겨울나기 한 봄철 연하디 연한 나물들이 그러하고 바다가 내어주는 해조류들은 봄이면 나긋나긋하게 입맛을 잃은 미각에 감겨들어 살맛 나게 한다. 기운 내서 한 해 항해하는 시간의 바다 위로 배를 띄우게 한다. 동해안 거센 풍랑에도 아랑곳없이 갯바위에 매달린 돌미역은 단단한 바위를 두드리며 단련되어 거친 듯 두껍고 구수한 맛이 난다. 반건조 돌미역을 불려서 된장 넣고 끓인 된장 미역국은 시원하고 진한 바다 향을 머금었다. 


나는 단지 모종을 심고 씨를 뿌렸을 뿐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물을 주었고 그마저도 하늘이 대신 뿌려주어 소홀하였다. 그런데 자연의 시간은 기적을 만들어주었다. 어디 진흙탕에 뒹군 이상한 차림새 도시농부는 남들 눈에 띌까 조심스레 공원길을 걸어오며 상추 열무가 가득 담긴 가방의 무게를 캐리어백 끌 듯 흐뭇하게 먼 여행길을 돌아온 이방인이 된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두 시간 만에 고향 산천을 헤매다 돌아온 것 같다. 먹고도 남아도는 이걸 가볍게 손질해서 로컬푸드마켓에 팔아도 좋겠다. 내 가족이 먹는 유기농 먹거리를 직거래방식으로. 중간 마진이 없으니까 더 저렴하면서 품질 좋은 농산물은 도시에 사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만족도가 높아진다. 선진국일수록 시티파머가 활성화되어있지 않을까. 기후변화에 민감한 농산물 가격이 치솟는 요즘 도시 주말농장이 더 많아져야 하는 근거이다.


무심한 달력의 숫자 아래 전에 없던 자연과의 약속이 새싹그림과 함께 깨알같이 표기되었다. 다음 주에는 김매기, 토마토 지지대 묶어주기가 적혀있다. 그때 그 무렵 절기에 맞게 데워진 볕과 바람 그리고 하늘이 알아서 키워주니 실천하고 조금만 기다리면 내 기대에 과분하게 자꾸만 듬뿍 얹어준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치여 지쳐버린 내게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반드시 지켜야 함을 가르쳐준다. 약속은 그런 것이다. 그때 그 시간 약속한 장소에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은 내 목숨이며 신념이다. 그걸 어기는 사람에게 무슨 우정을 기대할 것이며 무슨 의미가 남는 관계를 이을 것인가. 타임 킬링이나 하면서 수작 부리는 족속이 될 바에는 차라리 면벽수행 함이 백 번 천 번 나을 것이다. 


점점 단순해져 가는 삶의 방식이 마음에 든다. 노동의 강도만큼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여 작물을 키우면서 복잡한 잡념들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하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서 몸이 행하는 일에 마음도 열성을 내어 거든다. 마음도 일을 하는 것이다. 한가로운 틈을 타서 번식하는 망념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마음밭에 풀을 뽑는 정갈한 쟁기질을 하고 있다. 오월이다. 향기로운 장미도 약속을 지키려고 아픈 가시를 헤쳐 피어난다.     



 

올해 처음 피어난 장미와 보리, 늦지 않게 약속을 잘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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