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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n 05. 2023

사랑과 질서

여름 텃밭은 두 가지 복병을 다스리지 않으면 무질서해진다. 하늘에 뜬 태양은 자신의 질서를 철저히 지키지만 텃밭에 떠 있는 동안 농부는 숨바꼭질을 잘해야 한다. 술래가 된 태양이 두 눈을 벌겋게 뜨고 샅샅이 찾아내기 전 이른 아침 또는 저물녘 숨어있기 좋다. 


수시로 여백을 노리는 잡초는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언제든지 침투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오늘은 태양과 숨바꼭질하면서 잡초를 제거하는 날. 6시 일어나자마자 농기구와 밀짚모자, 팔토시를 챙겼다. 설익은 태양이 농익기 전 작업해야만 한다. 


동쪽에서 비스듬히 햇발이 펼쳐지는 이 시각 호미를 들고 이슬이 묻은 잡초를 캔다. 밭고랑은 그야말로 저 푸른 초원이 되려고 야단법석이다. 작물 생장에도 해롭거니와 뿌리가 깊어지면 캐기도 어렵다.

바랭이는 뿌리가 얼마나 질기고 힘이 센지 뽑아내기도 어렵다. 토마토 옥수수 가지 고추를 심어놓은 이랑 사이로 날씬한 내가 앉아있으면 꽉 찬다. 키가 자라나는 줄기들이 가지를 벌리면서 내 얼굴을 툭툭 친다. 이쁜 연초록색 토마토 열매들이 다칠까, 여린 가지들을 부러뜨릴까 조심하면서 움직인다. 


한 달여 전 방울토마토 찰토마토 다섯 포기씩 심어두었는데 어느새 앙증맞은 열매들이 맺히고 자라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신기하여 사진을 찍는다. 찰토마토 한 개는 아기 주먹만 하다. 고추와 가지는 멀칭 안 한 노지에 심었더니 생장 속도가 더디다. 이제 막 미색 고추꽃 연보라색 가지꽃이 피어난다. 



옥수수는 내 무릎 위로 껑충 자라서 기다랗게 늘어뜨린 이파리를 스칠 때면 스걱이는 풍경 소리 들린다. 내 키만큼 웃자라면 옥수수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 속에 들어앉으면 여름도 비켜 간다. 어릴 적에 엄마는 김을 매느라 밭에 붙어살다시피 했다. 심심한 나는 엄마를 기다리면서 작은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면서 옥수수 그늘에 앉아서 놀았다. 


어릴 때는 엄마가 왜 밭 매는 일에 진심으로 열중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작 열 평 농사를 직접 지어보니 알겠다. 매고 돌아서면 송송 돋아나는 잡초의 본성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을. 그저 부지런해야 당해낸다. 빈둥거리는 불량 농부는 잡초와 싸우고 싶지 않다. 빈 땅 노는 꼴을 못 보는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고 싶다.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한 달에 한 번 호미질할 생각이다.


빈속에 쪼그리고 앉아서 오른팔은 호미질, 왼팔은 잡초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서 버리는 동작을 계속하고 있으니 힘들고 지루하다. 폰에 저장된 FM 음악방송 앱을 틀었다. 스타쉽(Starship) 세라(Sara)가 흘러나온다. 꽉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질주하는 기분이 들면서 작업에 속도가 붙는다. 혹 근처 어르신들 음악 취향에 안 맞을까 볼륨을 살짝 낮춘다. 


한 달 이상 돌보지 않아서 생긴 잡초들을 틈틈이 매주었다면 이렇게 무성하진 않았을 텐데…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쁜 생각과 욕망이 무성하게 자라나기 전에 작은 새싹부터 도려내고 잘라주면 청정한 마음 즐겁지 아니할까. 욕구불만으로 심술이 올라오기 전에 털어내고 닦고 살뜰하게 보살펴준다면 시원한 솔바람이 솔솔 불어오리라. 


밭 매기 후, 전.. 쪼그리고 앉은 발자국이 찍혔다


멀칭 비닐이 조금씩 열받는 걸 보니 태양이 슬슬 동쪽 궤도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음악방송 DJ가 바뀌려는지 광고송이 나온다. 두 시간 가까이 쪼그려서 맨 김매기 작업이 얼추 끝났다. 벌레 먹어 곰보가 된 얼갈이배추는 남편이 모두 뽑아놓았다. 데쳐서 먹을 것만 조금 고르고 대부분 버렸다. 아깝지만 식용 가치가 떨어진다.


상추 타워는 빙글빙글 돌고 돌아서 피라미드 모양이 돼간다.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 잎들을 아낌없이 내주었는데 생장의 꼭대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 몇 번 더 거두고 나면 새 모종을 심어야 할 것 같다. 이번 주에는 부산에 사는 언니에게 아이스박스 포장 택배로 보내주었다. 정말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리는 고마운 상추이다.

태양이 뜨겁게 거하는 여름 텃밭은 토마토를 붉게 익혀놓을 것이다. 보낼 건 보내고 새 식구는 맞아들이며 여름의 질서를 따르는 텃밭에는 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시간이 창조하는 흐름을 호기심으로 지켜본다.



집으로 돌아와서 손을 깨끗이 씻고 핸드크림을 발라주었다. 두어 시간 호미질했다고 손가락이 뻣뻣하다. 지난 토요일 역사적 허물을 덮고 평화로이 잠들어 계시는 융건릉 뒷동산을 걷고 내려와서 근처 베이커리카페로 갔었다. 그곳은 한옥 건물이 여러 동 저수지를 내다보는 산자락에 조성되어 있다. 


1층 한옥 빵집에서 빵을 사서 나무계단을 딛고 2층으로 올라가면 카페가 있고 바깥으로 나가면 커다란 차양 파라솔 아래 쉬는 의자들이 여러 곳에 있는데 이런 모습은 위쪽 한옥 건물로 올라가는 내내 조성되어 있다. 특이한 건 산길로도 보행로가 이어져 사람들은 여기 아래쪽에 앉았다가 싫증 나면 위쪽으로 이동하고 또 산길로도 올라가서 어슬렁거리다가 내려온다. 


나 역시 그러했다. 처음에는 빵을 사서 2층 바깥으로 나가서 잠시 앉아있다가 위쪽으로 이동했다. 한옥 한 동은 옷가게, 옆 한옥은 금은보석을 팔았다. 초록색 네모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무명지에 끼워보았다. 그러자 옆에서 쇼핑하던 아줌마 서너 명이 갑자기 내 손가락을 주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나 들으라는 듯 말한다. 

“어머 저 손가락 좀 봐. 어쩜 저렇게 기다랗게 생겼지. 손모델 해도 되겠네. 손톱도 예쁘게 생겼어…”


더 이상 듣기가 낯간지러워 황급히 반지를 빼고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와버렸다. 내 눈에는 다소 거친 듯 보이는 내 손이 누군가에게는 귀족손으로 보이나 보다. 

‘맨날 설거지하고 밥해 먹는 이 손으로 글도 쓰고, 텃밭 농사도 짓습니다!’

막 부려먹는 손인데도 아직 쓸 만한가 보다.


바로 아래 분수대 옆 파라솔에서는 라이브가수가 노래 부른다. 

곡명은, 소리새 ‘그대 그리고 나’

6월 초 날씨는 5월 초순으로 되돌아간 듯 미세먼지 없는 푸른 하늘은 흰 구름을 비질하듯 쓸어내고 시원한 바람이 녹음을 뒤척이며 불어온다. 9월 하순 가을의 어느 멋진 날 같다. 건너편 한옥 앞마당에선 야외 웨딩이 막 시작되려는지 잘 차려입은 축하객들이 모여 부산하다.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웨딩 한옥 건물보다 더 높은 위치여서 잘 내다보였다. 검정색 양복을 잘 차려입고 가슴에 꽃을 꽂은 준수한 외모의 새신랑 모습이 금세 눈에 띄었다. 


그런데 새신랑 같은 또 한 사람이 보인다. 감색 양복을 쫙 빼입은 그 역시 가슴에 작은 꽃을 꽂았다. 흰 장갑을 끼고서. 중후하고 잘생긴 그도 새신랑 못지않다. 도대체 신랑은 누구란 말인가. 후자의 동선을 따라가니 그는 분홍색 한복을 입은 신부 엄마 옆에서 자꾸만 얼쩡거렸다. 아하, 저 사람은 신부 아버지로구나.


신부 아버지 표정이 너무 밝고 환하다. 딸을 시집보내는 조바심이라거나 기우는 안 보인다. 오히려 싱글벙글 미소를 듬뿍 머금었다. 신부 부모님 나이는 많아야 예순 안팎. 두 분 다 인물이 좋으시고 교양이 있어 보인다. 

저런 부모님을 둔 신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느새 나는 생판 모르는 남의 결혼식을 이편 언덕에 서서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어있었다. 꼭 옛날 큰집 마당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던 사촌 언니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식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라이브가수는 자리를 떴고 야외결혼식이 치러지는 한옥 마당에선 감미로운 리차드 샌더슨의 리얼리티(Reality) 음악이 분위기를 살랑살랑 어루만지며 오색 비눗방울을 떠다니게 만든다.


저녁 6시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목소리 좋은 얼짱 사회자는 자신이 신부 친구인 아나운서 OOO라고 소개했다. “신부 입장” 외치자 신부 아버지가 신부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신부 얼굴을 보았다. 아, 신부는 서구형 미인이었다. 오똑 솟은 콧날 반달눈 기다랗게 뻗은 목이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란히 선 신랑 신부는 둘 다 키가 크고 선남선녀였다. 

서쪽으로 살짝 기운 저녁 햇살이 신부를 축복하듯 물들이고 맑은 초여름 바람이 신부의 새하얀 면사포를 들었다 놨다 흔들었다. 속없는 바람이 신부의 면사포를 살짝 들어 올릴 때 그녀의 맨살 등이 절반쯤 드러났다. 대리석으로 깎아놓은 것 같은 처녀의 군더더기 없이 날씬한 등이. 


흠잡을 데라곤 없이 가파른 척추 라인이 올곧고 순탄하게 자란 그녀의 인생 초반 길을 말해준다. 

이제 그녀는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서 새로운 인생길을 앞두고 있다. 앞으로도 무탈하게 잘 걸어가길 이편 언덕에 선 내가 기원해 준다. 저 새신랑은 얼마나 행운아인가. 일평생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미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허영심이 들어있지 않다면 두 사람은 살아가는 내내 행복한 부부로 나이 들어갈 것이다.


기나긴 인생길을 앞둔 첫출발, 알맞게 데워진 온도 부드러운 바람결 예식이 진행되는 야외 울타리 아래 제철 맞은 베이비핑크 장미마저 활짝 피어나서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 출산 기피 한다는데 그래서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는데 순수한 사랑 앞에 조건이 무슨 소용이랴. 여름 파도에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아두고 사랑의 조건이라 말한다면 거짓이다. 수평선을 마주 보며 우뚝 솟아서 바다를 훤히 비추는 눈부시게 흰 등대 같은 사랑은 영원하리.     





아름다운 신부를 축복해주는 장미들이 초저녁 기우는 햇살에 명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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