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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l 12. 2023

장마

음습한 기운을 몰고서 장대비가 내리꽂힌다.

방충망에 쌓인 먼지를 씻고서, 나뭇잎을 뒤척이며, 새들 깃털 씻겨주며 배수로를 따라서 흘러간 빗물은 개천으로 강으로 합류 바다로 나아간다.

실내에 거하며 우산이 필요 없는 내게 빗물은 습기를 한가득 습격한다.

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기침이 난다.

한두 번 그치지 않고 연거푸 콜록콜록……

하도 해대니까 들썩이는 어깨가 뻐근하다.


개똥쑥 홍삼으로 버티다가 어제는 건도라지를 끓여서 마신다.

별 효과가 없다.

목소리는 애저녁 맛이 갔다.

이렇게 끈질긴 기침이라니, 여름 바람이 겁난다.

목에 손수건을 두른 환자가 되었다.

창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비가 열린 창틈을 비집고 폐부로 차곡차곡 쌓여서 들어온다. 

말간 하늘이 드러나서 해가 반짝 내리비추면 불청객 기침을 데려갈까.


수조로 둘러싸인 공간에 갇혀서 일주일 내내 기침과 씨름하다 보니 장마에 손발이 묶인 장마병 환자가 돼버린 느낌이다.

속수무책 비를 맞는 텃밭 사정이 궁금하다.

발길을 끊은 지 열흘이 지나간다.

아파트 주차장 들어가는 핸들을 꺾기 전 여러 번 텃밭으로 가는 직진을 잠깐 고민한다. 

발목이 댕강 드러난 바지를 입고 한 시간 넘게 머물면서 숱한 모기들의 공격을 받았다. 

여기저기 화산활동을 하는 발적이 여태 후유증이다.


찢기고 쓰러지면 어떡하나?

고구마밭은 그야말로 정글이 돼버렸다.

고랑을 덮고서 발 디딜 틈조차 허용 않는 초록색 연못은 수심이 깊어 보인다.

그저 가장자리 서서 뿌듯하게 지켜본다.

생육이 왕성하다. 심어놓고 한동안 조바심 냈었다.

비실비실 말라비틀어져 영 소생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장난 삼아 꽂아놓으니 저 모양인가. 물도 여러 번 주었다.

그랬던 고구마가 모두 살아나서 이웃 텃밭으로 넘어갈 기세, 순을 한차례 꺾어 들깻가루 볶음 맛있는 나물 반찬이 돼주었다. 버릴 게 없다.

줄기가 저리 왕성하게 자라니 땅속 둥근 뿌리 또한 잘 자라서 자줏빛 가을을 선물해 주겠지……



늘씬하게 자란 옥수수는 꼭대기에 승리의 깃발을 흔들면서 붉은 머리털이 달린 아기들을 업고 있었다. 

초록색 포대기에 둘러싸인 아기들은 떨어질 염려 없이 견고하게 매달려있었다.

바람이 불면 살그랑살그랑 흔들리는 그 소리는 아기들 잠재우는 자장가였구나.

알맹이가 차올라서 탱탱하게 엉덩이가 미어지면 꺾어도 되겠구나.

내 손으로 심은 옥수수를 한솥 그득 쪄서 구수하게 하모니카 부는 저녁을 상상한다.



찰토마토는 어찌나 탐스럽게 둥글어가는지… 매일 밤 지구 자전 소리에 맞춰 둥글게 둥글게 자라나는가.

토마토는 조금 붉은 기가 돌면 재빨리 따주어야 한다.

그때를 놓치면 인근에 사는 까치들 입속으로 직행한다.

여러 번 그랬었다.

눈에 띄게 붉은 토마토는 어김없이 까치들 소행으로 보이는 흔적이 파먹었다. 

까치밥은 감나무에만 매달린 게 아니었다. 



다섯 포기 오이고추는 따 먹기 바쁘게 주렁주렁 달렸고 상추는 소량 새로 심었다.

먹을 만큼 심다 보니 여분의 땅을 놀리고 있다. 

우리가 먹기에는 열 평 텃밭이 너무 크다.

장맛비가 소강상태여도 텃밭으로 가는 발걸음이 내키지 않는다. 

모기를 키우는 정글 텃밭이 늪으로 변하기 때문에.

풍뎅이 텃밭이여, 쓰러지지 말라. 서로서로 결속 잘 버티어라.

식물이든 사람이든 성장기 때는 비바람이 필요하다.

모진 비바람에 시달리며 천 갈래 만 갈래 흔들릴 때 똑바로 나아가는 길이 보인다.

고요할 때는 안 보이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은 집으로 돌아오는 귀로, 자아를 되찾는 근원의 길.

이 비 그치면 더 풍성해진 열매를 머리에 얹고서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오고 싶다.

감기에 걸려 흩어진 나를 바로 세우고 싶다.

이 비 그치면.          


어제 마트에 갔다가 한 아이를 마주쳤다.

버섯 코너에서 버섯을 고르는데 카트에 탄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서너 살 돼 보이는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안녕!”

“나도 팔찌 집에 있는데…”

아이는 내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줌마 팔찌는 보라색이야. 네 팔찌는 무슨 색이야?”

“초록색”

“우와~ 예쁘겠네”

“버섯”

아이는 버섯을 손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맞아, 버섯. 말도 잘하네. 엄마랑 시장 보고 잘 가.”

"빠이빠이~" 손을 흔들어준다.

또랑또랑 두 눈이 반짝이며 웃는다.

장맛비 얼룩진 창문을 열고서 한 아이가 웃었다. 

기침이 멎었다. 



         

박수근 작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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