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

by 남연우

뒤끝 작렬하는 늦더위가 움츠러들 기미가 안 보인다.

땡볕이 쏟아지는 보도블록 비집고 터를 꾸린 잡초들도 제풀에 지친 모습이다.

뿌린 대로 거두는 이치 따라서 또다시 배추 모종을 심고 물을 주러 가는 이 길을 앞으로 반복할 일이 따분하면서도 어느덧 밤송이들이 토실토실하고 커다란 고무 물통에 빠져 둥둥 떠다니는 땡감을 보는 순간 거부할 수 없는 가을이 눈앞에 당도했음을 시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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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칠팔월 텃밭으로 가는 발길을 뚝 끊었다.

아열대 정글숲 텃밭에는 모기들이 기승을 부린다.

한두 번 갈 때마다 독한 모기에 물려서 팔다리 성한 데가 없었다.

긁고 약 바르고 이 주일 넘게 발적이 지속되는 걸 보면서 가고 싶은 의욕을 상실했었다.

주말마다 남편이 가서 텃밭 사정을 살피고 잘 익은 토마토 몇 개, 고추 대여섯 개, 가지 서너 개 따왔었다.


기대를 모았던 옥수수는 들쥐들이 다 갉아먹었다.

딱 한 번 삶아 먹은 게 전부이다.

들쥐 소행으로 단정할 수 있는 건 직접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산책길에 잠깐 들렀더니 무성한 고구마순을 휘저으며 통통하게 살 오른 들쥐 한 마리가 냉큼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옥수수는 고구마 바로 뒤에 심겼다. 어쩜 알이 여문 옥수수는 귀신같이 아는지 사람이 손수 긁은 것처럼 빈 송이만 남아있었다.


한여름을 지나며 풍뎅이 밭은 어느 것이 곡식이고 어느 것이 잡초인지 구별이 어려운 그야말로 쑥대밭.

우후죽순 자라난 잡초를 남편은 몇 주 전부터 가위로 싹둑싹둑 잘랐다고 한다.

부실해진 끝물 토마토 옥수숫대를 다 뽑아내고 가을맞이 텃밭 정리를 새로이 하였다.

어제 오랜만에 텃밭으로 배추 모종을 사들고 가보았다.


여기 일 년짜리 나의 땅이 있었다.

내가 덥다고 외면했을 때조차 무던히 기다려준 땅이 있었다.

풀들은 말끔히 제거되어 산뜻하게 맨흙을 드러낸 땅이 왜 이리 정겨운지...

너덜너덜 해진 초록 외투를 벗고서 새 옷을 입혀달라 어깨를 움츠린다.

투덜대던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물려주듯이 돌보지 않은 나의 게으름을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은 채 반가이 맞아주는 땅이 푸근하게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준다.

잘 왔다고, 잊지 않고 찾아주어 고맙다고 내게 말해주는 것 같다.


지난봄 텃밭 이랑과 고랑 사이 비스듬히 새끼손가락만 한 고추모종이 자라고 있었다.

흙속에 들어있는 고추씨가 자연 발아한 것 같았다.

심지도 않았는데 번지수를 잘못 알고 찾아와 준 어린 고추가 귀하게 여겨졌다.

뽑아서 반듯한 자리에 심어주었다.

여름 내내 이 고추에 대하여 잊고 지냈다.

세상에, 아기 고추가 자라고 자라서 몰라보게 키가 껑충 커졌다.

이 고추는 찌개에 넣으면 감칠맛 나는 청양고추였다.

지난번 남편이 따왔던 작고 맵싸한 고추가 바로 이 고추였다.

직접 보니까 너무너무 반갑다. 생김새를 살펴보니 앞으로 여러 번 따먹을 수 있는 작고 귀여운 땡초들이 오밀조밀 달려서 성장하는 중이다. 결초보은이란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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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포기 땅콩은 한데 어우러져 저들만의 둥지를 틀었고 용케 살아남은 가지 또한 여러 개 살집을 키워가는 중이다. 그나마 풍뎅이 텃밭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고구마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줄다리기한다.

눈이 달렸는지 눈치가 여간 고단수가 아니다. 이제는 이웃 텃밭으로 절대 넘어가는 일없이 사각 틀 안에서 푸르게 푸르게 넘실거린다. 서로 업고 업혀서 옆으로는 영역 확장을 못 하니까 공중전을 치를 기세이다.

한 달만 기다리면 수확해 주마. 그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렴. 자주색 고운 꿈을 키우렴.


20230909_175407.jpg 땅콩 알아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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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고르기 한 맨땅에 봄날처럼 비닐 멀칭 씌우고 가을 상추 열두 포기, 김장 배추 모종 스물네 포기를 심었다. 종묘상 사장님은 어찌나 깐깐한지 튼실한 모종을 고를 수 없게 억지를 부렸다.

등 떠밀리듯 받아온 모종 포트에 한 포기가 발육이 안 되어 빈 통이 들어있었다.

결국 스물 세 포기를 심게 되었다.

저물녘 노을 진 하늘 아래 쪼그려 앉아서 일했다.

더울까 염려되어 가져온 손수건과 물통이 필요 없을 만큼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해가 많이 짧아졌다.

모종을 심고서 허리를 펴니 어둑어둑하다.

물을 골고루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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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시각 다시 가보았더니 발육이 부진한 일곱 포기는 하룻밤새 시들시들 생기를 잃었다.

물을 흠뻑 뿌려주었다.

소생의 기미가 안 보이면 새로 심어야 할 것 같다.

가을이 되니 마음이 바빠진다.

한동안 아침저녁 배추 물 주러 다녀야지, 준비하고 있는 어떤 프로젝트 매달려야지, 걷기 운동해야지, 고구마 수확해야지, 아이들 보살펴야지, 잘 키워서 김장배추 수확해야지, 늦더위를 떨쳐내고 새초롬한 표정으로 곧 당도할 가을 타야지... 이 모든 걸 성실히 가뿐히 실행하면서 남실바람 부는 가을에는 들국화 피어난 저 언덕 너머로 옷자락에 풀씨를 붙여가며 깊고 서늘한 빛깔 나의 용담을 찾아서 헤매고 싶다. 가을에는 필히 오색 무지갯빛 가시광선이 내리비추는 축복을 받고 싶다.



20230910_101829.jpg 텃밭 울타리에 보라색 형광등을 켠 나팔꽃이 얼굴을 감추며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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