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년 9월 30일 일기
오늘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3일 연휴를 맞이하여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내 눈앞을 오가고 있다.
하지만 농촌 아이들은 넓은 들에 서서 일을 한다.
그중의 하나가 나 자신이기도 하다.
아침 들논에 나가 볏단 위에 덮어둔 비닐을 거뒀고
지금은 언덕 위까지 열심히 볏단을 나르는 중이다.
머리에 이고는 있으나 줄기들이 늘어져 내 눈앞을 가린다.
길이 난대로 무작정 걸어가고 있다.
그것이 힘이 들 뿐이지 고통스러운 일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조금 힘쓴 일이 훗날
보람을 맛볼 수 있는 날이 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공평한 분이시다.’
고통은 보람의 결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쓴 일기를 꺼내보았다.
추석 연휴였나 보다.
수확을 앞둔 다랑논에 아버지 명을 받들어 투입되었다.
그땐 그랬었다.
집집마다 사정은 조금 다르겠지만 아동의 노동력이 농촌 현장에 절실한 시절이었다.
어디 논뿐이겠는가. 밭으로도 수없이 불러 다녔다.
고추 따고 땅콩 캐고 고구마를 캤다.
어느 달이 휘영청 뜨는 밤에 리어카를 끌고서 밭고랑에 널브러진 고구마들을 주워 담아서 싣고 앞에서는 언니가 끌고 뒤에서는 내가 밀고 천변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며 집으로 왔었다. 가을 달밤에, 달빛에 취하여, 일한 그 기억이 새록새록 새롭다.
차도녀가 된 지금 어릴 적 기억을 소환 텃밭 고구마를 캤다.
시월이 되자마자 하늘은 새파랗게 창을 열고서 경계가 없는 시공간으로 꿈을 펼친다.
눈가에 뚝뚝 떨어지는 푸른 물을 닦아가며 7미터짜리 이랑 세 줄을 파내는 미션은 ‘두더지 작전’.
남편이 멀칭 비닐과 고구마 줄기를 제거하고 나는 호미로 땅을 팠다.
위에서 찍으면 고구마들이 상할까 봐 V자 모양 이랑 옆구리를 긁었다. 흙은 생각보다 무겁게 저항했다.
양쪽에서 긁어모은 흙더미가 정중앙에 쌓이면서 갈 길을 막아섰다.
에휴, 흙을 이길 재간이 없다. 한 손으로 힘들면 두 손으로 긁을 때 부딪히는 느낌이 들어 보면 선명한 자주색 고구마 옆구리가 툭툭 불거졌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힘을 내본다.
호미 날이 정수리를 더듬는 어떤 고구마는 지하 30cm 아래 깊숙이 들어가서 꿈을 꾸고 있었다.
거기가 그리 좋으냐?
빛도 안 드는 단칸방 숨 막히지 않느냐?
다치지 않게 살살 더 깊이 파 내려가서 지하 갱도에 갇힌 광부를 구조하듯 세상 밖으로 꺼내준다.
흙이 내리누른 압력 때문인지 작달만하다.
고향 집 밭은 사토질이어서 고구마 줄기를 잡아당기면 고구마들이 줄줄이 딸려 나왔었다.
여기 텃밭 사정은 다르다. 줄기는 줄기대로 끊겨버리고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어찌나 꼭꼭 숨어있는지 술래가 된 나는 어디에 고구마가 숨어있을지 몰라서 점토성 흙을 긁어내느라 고역이다. 줄기가 가닿을 것 같지 않은 밭고랑에서 튀어나온 애도 있었다.
색 고운 자수정을 캐는 광부가 되어버렸다.
흙과 한판 승부 2~3미터 전진하고 나자 기운이 빠져버렸다.
딸에게 전화를 걸어 새참 급배달을 요청하였다. 둥근 팥빵 한 개를 먹고서 재충전 호미자루를 잡았다.
볕이 잘 드는 땅은 둥그스름한 거인들이 몇 개 출현하였다. 감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음지로 갈수록 습한 땅은 길쭉한 고구마들을 길러내었다. 자줏빛 비단 드레스를 입고서 뽐내는 고구마는 투박한 외모와 달리 심성이 부드럽고 달달하다. 겉모습만 보고서 쉽사리 판단해선 안 되는 인상에 대하여 눈빛과 느낌으로 관상을 읽으려 드는 내 편견을 어찌하면 좋을까.
캐기 전 수확량을 두고 점심 내기를 하였다. 남편은 한 박스, 나는 두 박스. 승부가 슬슬 판가름 난다. 한 박스는 거뜬히 넘겨 두 박스를 가득 채울 것 같다. 주위 텃밭 어르신들이 그랬다. 이 땅은 고구마가 잘 안 된다고.
며칠 전 시험 삼아 남편이 한 줄 걷어내고 캔 고구마가 달랑 한 개.
그건 땅을 얕게 팠기 때문이다. 그 밑에 숨어있는 애들을 모르고서 말이다.
내 짐작대로 이케아 쇼핑백을 채우고 감귤 박스를 가득 채웠다. 마침 이웃 텃밭에 일하러 나온 분에게 저녁 한때 쪄드시라며 고구마를 나눠주었더니 호박 한 덩이, 수세미를 한 개 따 주었다. 내가 키우지 않은 작물을 받아 드니 기분이 좋다.
이제 고구마 밀림은 맨땅이 되었다.
풍뎅이 텃밭은 말라죽고 남은 배추 열 포기, 상추 예닐곱 포기, 땅콩 서너 뿌리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지난 3월 분양받아서 봄에 파종, 무더운 여름 내내 방치, 가을에 이르러 풍성한 수확을 안겨 주었다.
감사하다. 애써 매달리지 않아도 씨 뿌린 대가를 저절로 안겨주는 자연에 감사하다.
고구마를 캐면서 알았다. 그 아이가 지금의 나보다 더 강인하였다는 걸.
힘든 노동을 하면서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고통 뒤에 결실을 주시는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을 햇볕에 반짝거리는 그 아이의 눈부시게 까만 단발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흙이 묻은 말랑말랑한 손을 쓰다듬고서, 손톱 아래 낀 새카만 흙을 파내주면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넌 침착하고 점잖고 인내심이 강하고 착한 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