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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Jun 27. 2023

영웅의 제복과 원피스


# 벽화가 그려진 어촌 풍경


바다로 간다. 백사장을 성큼성큼 뛰어서 바다로 간다.

백색 사념의 파편들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바닷가에 선다.

잔잔할 때나 풍랑주의보가 발효될 때에도 기우는 법이 없는 수평선이다.

얼마나 깊고 넓어야만 도달하는 수평인가.


잔챙이에 시달리는 일상조차 개의치 않으면서 평온을 유지하는 인격을 바라본다.

언제나 수평선을 가진 바다가 좋다.

내면의 수평선이 기우는 날에는 바다가 보고 싶다.

탁 트인 그 바닷가에 서면 나도 수평선이 된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평정심으로 파도를 따라서 걷는다.

바람에 흰 레이스 소맷자락을 펄럭이는 바다는 이전에 적신 적 없던 경계를 넘어서 맵차게 파도를 일으킨다.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열 감지 카메라 센서가 달렸나 보다.

말초신경이 꿈틀거리는 바다는 거대한 생체조직이어서 한 사람의 발자국을 금세 읽고 지운다.

자신의 영역을 백지로 만들면서 조개껍질을 게우고 바위에 붙은 미역을 따서 선물인 척 던져준다.

미역귀가 달린 싱싱한 돌미역을 주웠다.


고향 어촌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들판을 건너서 방파제에 올라서고 나면 편식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들길을 따라서 집으로 곧장 되돌아갔었다. 어촌 마을로 발길을 돌린 적은 거의 없었다.

소나무 방풍 묘목이 심어졌고 바다를 굽어보며 쉴 수 있는 의자가 생겼고 이리저리 흩어져 흐르던 골목을 구분 짓는 허물어져 가는 담장이 산뜻한 벽화를 입었다.

구멍가게 새우깡을 훔쳐 먹으려 나직하게 날갯짓하는 갈매기들이 담장 위로 날아오르고 여름 바닷가에서 순백의 꽃들을 피우는 목련은 봄이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너무 빳빳하고 구김이 없는 새 옷으로 갈아입어서 아무 색도 칠하지 않은 이전의 모습이 오히려 더 유물 느낌 눈길을 끈다. 금세 내려앉을 듯 펑퍼짐한 이등변삼각형 지붕을 간신히 지탱하는 적갈색 양철 벽체는 쇠락해 가는 초저녁 햇살과 함께 잠시 멈춘 내 그림자를 압축해서 끌어당긴다. 나의 실상을 들키고 만 진회색 그림자가 못다 한 말을 대신 고백한다. 강렬하게 사로잡힌 지금 이 느낌을.         


 




# 영웅의 제복과 원피스


‘위대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

6.25 전쟁 제73주년 기념식에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왔다.

정전 70주년 기념 ‘영웅의 제복’을 입은 아버지는 편찮으신 몸을 벌떡 일으키셨다.


70년 전 새파란 청춘이었던 아버지는 전쟁 포로가 되어 압록강변 만포진에서 구사일생 생환, 정전협약과 함께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한반도 남과 북을 종횡무진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워 이겼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로운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는 우연한 결과물이 아니다.


이제는 말을 듣지 않는 노구를 휠체어에 의지한 채 멋진 상아색 제복을 입고 기념식에 참석한 영웅들과 아직도 산천에 묻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웅들의 헌신이 만들어낸 기적의 결과물이다.

집에서는 늘 아버지이신 우리 아버지가 연단에 올라 만세 삼창을 하실 때는 6.25 전장을 누비던 조국의 위대한 영웅이셨다. 몸속 깊이 낙인찍힌 전쟁의 트라우마를 떨쳐낸 채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려 아버지가 먼저 “만세”를 외쳤고, 객석에 앉은 내외빈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만세” 따라 외쳤다.

이것은 조국의 부름에 응답하는 우리 모두의 합일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아버지는 현재 시점 노인으로 되돌아왔다.

피곤해하셨고 울진군에서 마련한 점심식사를 함께 하지 못하고 집으로 모셔왔다.

올해 6.25는 음력 5월 8일 엄마 아흔 생일이다. 시니어 옷집 여러 군데 발품 팔아서 마침내 눈에 띈 원피스를 엄마 생일 선물로 장만해 드렸다. 아흔 할머니가 입는 원피스가 어울릴지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어여쁜 야생화들이 피어있는 우아한 꽃무늬 옷을 엄마에게 입혀드리고 싶었다.


한평생 여자로서 살아온 고귀한 삶이 아흔 고개에 이르렀으니 엄마는 이쁜 옷을 입을 자격이 있다.

영웅의 제복을 입은 아버지와 고운 원피스를 입은 엄마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처럼 잘 어울렸다.

집 앞 제철 맞은 수국 앞에서 사진을 찍어드렸다.

언젠가는 아름다운 원앙새 되어 저 하늘로 훨훨 날아갈 부모님!

나의 이목구비 손가락 발가락 오장육부 머리카락까지 귀중한 육신을 만들어주신 부모님!


가냘픈 엄마 손가락을 어루만지고 잠든 아버지 이마를 쓰다듬는다.

내 몸에 깃든 뼈와 살인데 나중에 나중에 어떻게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낼지 짐작조차 안 된다.

옥상으로 올라가서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들판에 사는 개구리들 요들송에 얹혀 저쪽 골짜기에서 소쩍새 울음이 타전된다.


서쪽 밤하늘에는 초여드레 초승달이 어둠에 묻혀 광채 나는 옆모습 드러내고 언제나 그 자리 북두칠성이 반짝이는 영감(inspiration) 한 국자 끼얹어준다. 신비로운 밤이다.

천 년의 시간이 겹쳐진 아득한 전설의 밤이 이식되어 흐르는 전율을 느낀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야를 과잉자극하는 온통 경박한 조명등, 차 소리, 별들을 가로막는 희뿌연 어둠, 공해에 찌든 나날들 속에 블루 토파즈 나의 수평선은 위태롭게 흔들린다.


대나무가 에워싼 고향 집을 수호하는 저 아늑한 하늘의 그윽한 별님들이시여, 부모님을 지켜주소서…

한 아이가 태어나 뛰어놀며 자랐던 이 마당 깊은 집을 신성한 별빛이 내리게 하소서…

단 하룻밤의 축복으로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 고향산천은 내가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싶은 영원입니다.    



                                       

       

 앞집 폐가 부서진 담장에도 아랑곳없이 여름볕을 담는 접시꽃이 수국보다 젊다
북두칠성 별빛이 희한하게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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