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대신 선글라스이다.
입에 재갈을 물리는 대신 눈을 감추는 것은 답답하지 않아서 좋다.
눈에 간장물을 달여 넣고 세상을 보면 시뻘건 대낮의 광경들이 덜 적나라하다.
햇빛에 미간을 찌푸린 내 얼굴을 가려주어 공개적인 은밀함 뒤로 숨는다.
눈길을 마주칠 일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보고 싶은 걸 보면서 들키지 않아서 재미있다.
만약 눈에도 숨구멍이 열려있다면 그래도 선글라스는 훼방하지 않는다.
밀착이 안 되니까.
여름 태양 아래 맞서는 최강 도구 모자와 선글라스만 장착하면 겁낼 필요 없다.
저 쨍쨍하고 이글거리는 거리로 감히 나서는 것이다.
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의 청년이 지나가고, 엄마와 길을 걷던 소년이 외친다.
"오늘 무지 더워. 엄청 더워."
머리털이 밤송이처럼 일어난 소년의 이마에 땀방울이 흐른다.
저 나이 아이들은 한겨울에도 뛰고 나면 덥다고 한다.
그러니 오죽 더울까.
올해 들어 제일 더운 날씨는 아니다.
지난 5월에 30도 찍었으니까.
곧 닥쳐올 한증막 더위를 우린 잘 안다.
그래서 입을 다무는 것이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양반이지.
도포차림 갓을 쓴 양반이 느긋하게 걸을 만큼 체면 살려주는 양반다운 날씨.
6월의 태양은 관대하고 구름으로 지은 모시옷을 수시로 걸쳐 맹렬하지 않다.
나뭇잎이 부채질하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주니 걸어볼 만하다.
일요일 태양은 서두른다고 서둘러도 11시에 만난다.
뭉개고 깬 잠을 또 자고 쌀을 씻어 안치고 순두부찌개랑 애호박 새우젓 볶음을 만들고 아침식사, 커피, 결제 한 건 하고 나오니 이 시각이다.
현관문을 밀치고 나오려면 사지를 붙잡는 집안일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다 뿌리치고 나오면 덥거나 말거나 홀가분하다.
길가에는 행인들 눈치를 보는 칡이 바짝 엎드려서 덩굴손을 내민다.
겁도 없이 보도블록을 접수할 태세이다.
50cm만 넘어오면 자전거바퀴 사람들 발길에 짓밟힐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접근한다.
쟤가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교통사고 나게 생겼다.
아이코, 한두 번 찧고 나면 우회로를 찾을까.
뒤 안 돌아보고 직진하는 전투력이 놀랍다.
요새에 숨는다거나 물러설 줄 모른다.
창과 방패를 든 행진, 행진...
옛날 7번 국도 신작로 옆에 위치한 우리 집에 군인들이 한 부대 들어와서 자고 갔었다.
철모를 쓰고 배낭을 멘 군인들이 행군하다가 날이 저물면 민가에서 여장을 풀었다.
물을 구할 수 있으니 씻고 먹고 푹 쉬기에는 좋았을 것이다.
그때 마당 가운데 자두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때마침 붉게 익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광주리에 따서 시장에 내다 파는 자두를 군인들이 다 털어 따먹고 간 기억이 난다.
나라 지키는 군인들이니 쉬어간다면 쉴 자리를, 양식을 내어주는 그런 시절이었다.
씩씩하게 행진하는 칡을 보면서 머뭇거리는 나의 행진을 생각해 본다.
사기와 혈기로 똘똘 뭉쳐 앞으로 나아가는 행위는 거리로 측정되며 목표물에 닿으면 성취를 이룬다.
힘없이 흐물거리며 제자리 맴도는 멈춤과는 차원이 다르다.
의지를 가지고 나아간 만큼 성장하는 길이다.
요동치는 맥박,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근육의 힘, 조이고 풀어지는 관절 가동력, 두 팔을 흔들며 쟁반을 인 듯 머리 위로 태양을 영접하면 펄펄 끓는 열기가 생각이란 찌꺼기를 열탕 처리 수증기처럼 날려 보낸다.
셔츠는 흠뻑 젖은 채 무념의 경지에 이른다.
그 길이 깎아지른 해안절벽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라면 시원한 공간적 해방감을 선사한다.
녹슨 양철지붕이 덮고 있는 어촌 폐가 빨갛게 타오르는 글라디올러스는 검붉은 태양을 찌르는 글라디에이터(검투사)처럼 낡은 담장을 허물고 높이높이 자라난다.
한자리에 붙박이 성장은 치열한 수직의 길을 택한다.
수평적 거리에 익숙한 우린 고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리적 거리는 투시 가능한 세상을, 고도는 정신적으로 가늠해보는 눈높이를 요구한다.
끊임없이 나아가며 흐르는 물이 바위를 깎듯이 지성이면 감천, 뜻을 이루는 행위를 나는 과연 습관적으로 하고 있는 걸까?
하는 둥 마는 둥 며칠하고 때려치우는 냄비근성으로 무엇을 만들어 먹겠다는 건지?
방해물이 막아서면 돌아서 가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다리힘이 빠질 때 쉬어가는 휴식이야말로 여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쉼표이다.
그 대목에서 자신을 성찰, 뼈저리게 뉘우쳐서 나의 조약돌을 움켜쥐는 그날의 성취를 행진이라 불러본다.
10분 평지를 걸어서 산속으로 들어간다.
이 무렵 산은 녹음이 짙다.
초록색 선글라스를 낀 나무들이 산길을 회색 그늘로 만들어준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는다.
한 시간짜리 행진을 멈추게 하는 바위에 앉는다.
요즘 들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
신고 온 신발은 숲 속 나무 아래 숨겨두고 걷는다.
산속은 부드러운 흙길과 잔잔한 돌멩이 깔린 길이 교대로 이어진다.
두꺼운 고무창에 갇힌 답답함을 벗어던지고 원시인으로 돌아간 발바닥 발가락이 지구표면과 만나 심호흡한다. 그 느낌 어떠할까.
첫걸음마를 배우는 아기같이 설렐 것만 같다.
비 오는 날에는 도자기 만드는 흙반죽을 치대는 느낌 아닐까.
언젠가는 말랑말랑 맨발 행진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
신발이라는 가식과 체면을 벗고서 자연의 품에 스며들고 싶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좀체 식지 않는다.
느티나무 아래 품을 내어준 바위에서 일어선다.
호숫가에 한 그루 자라는 풋사과들은 둥글게 둥글게 행진한다.
운동장 트랙을 따라 뜀박질하는 아이들을 키우듯이...
무수한 점을 찍으며 직선과 곡선의 행렬이 마침표에 이른 순간 사과는 붉게 뛰어내린다.
뒷배경에 허연 소금꽃을 피우면서 불타는 태양과 맞짱 뜨는 여름은 난이도가 높은 문제지를 내민다.
연필을 굴리면서 쩔쩔매고 고민한 흔적들이 소나기를 퍼붓는다.
머리를 두드리는 그 비 맞고 청신할 수 있다면 우산을 접어볼 것이다.
처마 끝에 낙숫물 떨어지듯 빗방울을 매단 머리카락이 여태 안 보이던 것을 보이게끔 길을 열어준다.
끝내 폐전봇대를 휘감은 칡은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며 향기로운 보랏빛 꽃을 피우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