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Handicraft
쓸모 있는 그 무엇을 만들기를 좋아한다. 기원을 올라가면 중학생 때부터였다.
다락방 대바구니에 안 입는 옷들이 담겨있었다. 이모가 처녀 때 입은 옷들이었다. 옷가지들을 만지며 놀다가 진갈색 벨벳 옷감에 손이 가닿았다. 너무 보드라운 촉감을 만지작만지작 그냥 버려두기에는 아까웠다.
무얼 만들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톡톡한 질감이 필통을 만들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퍼는 갈색에 어울리는 노란색으로 골랐다. 어찌어찌 투박한 바느질 좌우 합이 맞는 지퍼까지 요리조리 재며 달았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샤프 볼펜 지우개 넣어 사용하다가 고향 집에 두고 떠나왔는데 십여 년이 훌쩍 지나서 보니 아버지 책상 위에서 여전히 사용 중이었다. 조금 낡은 것 말고는 삐뚤빼뚤한 박음질 지퍼를 단단히 다물고 있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역시 중학생 때부터 써온 일기장을 펼치면 그 시절 순정만화 그림을 똑같이 일기장 여백에 그려놓았다. 스케이트화를 신고서 공중회전하는 여주인공 주변으로는 장미꽃잎 아니면 하트들이 희붐하게 날린다. 이게 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리는 근질거림 때문인가.
어느 날은 무작정 도자기를 만들고 싶어졌다. 돌 지난 아기를 떼놓고 주말이면 도자기 공방에 들락거렸다.
엿가락처럼 흙 반죽을 기다랗게 굴려 가며 둥글게 이어 붙인 원통형 연필꽂이를 처음 만들었다. 둥근 원통도 잘 만들었거니와 우물에서 갓 넘어온 것 같은 줄기와 포도송이를 입체적으로 붙였다. 푸른색 청포도 느낌이 나는 첫 도자기 창작품(100% 나의 아이디어)은 첫술에 배부른 애장품이다. 그 외 담쟁이넝쿨을 엮은 찻잔과 접시들을 창의적으로 만들어 실생활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여름방학 숙제로 재활용 만들기가 있었다. 이건 순전히 엄마 숙제이다.
무얼 만들까 고심하다가 택배 골판지를 잘라서 배를 만들고 아이스바 막대기를 꽂아서 천을 이어 붙인 돛을 만들었다. 돛을 쫙 펼치게 하는 무명실을 양쪽 배 앞부분과 선미에 꽂아둔 이쑤시개에 친친 감아서 고정하였다. 이 돛배 주인은 누굴 태울까. 아이가 예쁜 인어공주를 그렸다. 인어공주가 탄 배는 더 특별해야 하니까 밤하늘 별처럼 빛나는 불가사리를 두 개 선체에 붙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멋진 배가 건조되었다. 인어공주가 탄 배는 밤낮 꿈을 싣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거친 풍랑에도 아랑곳없이 낙원을 찾아서 때로는 저 먼 우주로 항해한다. 희망을 싣고서 무동력으로 나아간다.
손가락은 또 요술을 부린다.
바느질이 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패턴들이 그려진 원단을 보면 그 무엇을 만들고 싶었다.
반달파우치를 여러 개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우편물꽂이 앞치마 쿠션 커튼 바지 치마 가방 닥치는 대로 손바느질 뚝딱 만들었다. 손가락에 실과 바늘을 잡고 있으면 아무런 잡념이 일지 않았다. 은하 저 건너 베틀 짜는 직녀처럼 시간을 잊었다. 작은딸은 내가 만들어준 광목바지만 집에서 입는다. 몇 년 전 두 벌 만들어주었는데 너덜너덜 해져도 그 바지만 입는다. 비슷한 다른 바지를 사줘도 이게 제일 편하다며 그 옷만 찾는다.
그림은 여러 점 그려서 액자 만들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연꽃이 보고 싶으면 연꽃 그림을, 푸른 용담이 보고 싶으면 용담꽃을, 가을 들국화도 한 바구니 가득 그려서 벽에 걸어두었다. 아이들도 내 유전자가 그대로 전해졌나 보다. 큰딸은 미대 진학 디자인 전공을 하고 있다. 입시미술을 하여서 그림 실력이 엄마를 능가한다. 손가락을 섬세하게 움직이는 것도 닮아서 손뜨개 가방을 직접 만들어 내게 선물하였다. 작은 화장품 담는 바구니를 떠달랬더니 피스타치오 색깔 맘에 쏙 드는 바구니를 짜주었다.
작은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 만든 귀여운 도자기 작품들은 야물딱지다. 얘도 그림을 무척 잘 그린다.
어렸을 때부터 반 친구들이 딸 그림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작은딸은 부디 공부로 승부를 걸기 바란다.
손끝에 글썽글썽 묻어나는 글도 이 손가락 생김새 때문인가.
주제를 파고드는 집중력과 몰입감 그리고 약간의 창의성이 거들기 때문이리라.
집안 곳곳에 걸리고 눈에 띄는 핸드메이드 작품들은 시간이 지나도 쉬 퇴색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내는 기성 제품들과는 격이 다르다. 하나의 작품마다 추억이 묻어나고 이야기가 담겨있어 애틋하다. 한정판 보존가치를 높이려고 요즘은 만들기를 꺼린다.
보는 안목이 깐깐해서 박물관 기념품점에 들러도 현대 작가들이 만든 물건은 눈길을 사로잡는 경우가 거의 없다. 오히려 최근 다녀온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옛사람들이 만든 진귀한 작품들을 보면 경이롭다.
무지개 서린 나전칠기의 격조도 훌륭하거니와 어둑한 호롱불 아래 색색의 실을 뽑아 밤을 새워 만든 자수들을 바라보면 뜨락에 새초롬히 핀 봄여름 가을꽃들에 넋이 나간다. 옛 여인들의 미적 혜안이 고른 아름다운 색감의 보자기들은 과연 무엇을 감쌌을까. 곱은 손 호호 입김 불며 겨우내 만든 고운 설빔을 보자기에 싸서 눈길을 걸어가는 첫새벽 발자국이 내 마음속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