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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May 21. 2024

어린 시절의 추억

_Souvenirs d'enfance

쇼윈도 안 매장을 바삐 오가며 옷걸이에 걸린 옷을 제 위치에 자리 잡는 그녀는 이따금 동료 직원과 가벼운 웃음을 나누며 말을 섞곤 했다. 연한 그레이색 상의 유니폼을 입고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옷을 정리하는 모습은 여느 직원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드넓은 매장 남녀 옷이 뒤섞인 공간에서 제 위치에 정확하게 아이템을 갖다 놓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피팅룸에서 선택받지 못한 옷들을 다시 제 자리로 갖다 놓는 것 같았다.


일이 종료되는 시각은 밤 9시, 불과 5분을 남겨놓고도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딸의 모습은 방바닥에 자기 옷을 내팽개치는 평소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두 달간 알바하면서 체득한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집에서도 실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아웃렛을 천천히 거닐었다.


지난번 데리러 왔을 때는 서양수수꽃다리 향이 밤공기를 질식하듯 사로잡았다. 지금은 싱그러운 나뭇잎들이 게워내는 산소 알갱이들이 밤바람을 타고 불어온다. 붉은 기왓장을 얹은 개별 사업장 건물들은 중세 어느 밤을 소환하는 고전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공기 맑은 외곽 한적함 속에서 손님이 많든 적든 스트레스를 덜 받을 것만 같다. 멋진 건물들이 즐비한 길드하우스에서 상인들은 그들만의 동업을 결성한 길드가 아닐까. 


잠시 후 영업을 종료하는 음악이 야외로 크게 흘러나왔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이 점포 불빛이 일제히 소등되었다.

화려한 중세 도시의 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딸이 일하는 매장 불빛은 여전한데 알바하는 청년들 서너 명이 유리문을 밀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중에 긴 머리 짧은 소매옷을 입은 딸이 서늘한 밤공기에 아랑곳없이 보도블록에 튕겨 오른 공처럼 걸음을 내딛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깜짝 놀란다. 평소 주말 버스를 갈아타고 귀가하는데 이렇게 마중 나오니까 무척 좋은지 피곤함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웃음을 짓는다.


딸과 상쾌한 밤공기에 파묻혀 주차장까지 팔짱 끼고 걸으며 어떤 음악에 매료되었다.

영업 종료 음악, 그 음악이 이 밤과 너무나 잘 어울려서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인데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피아노 리듬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이 음악을 들은 상인들은 하루 매상에 상관없이 일제히 문을 닫았고 쇼핑 거리로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퇴근하는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이 아웃렛 출구쪽 램프구간을 따라서 줄지어 나왔다.

이 모든 질서는 그 음악이 이끄는 멜로디에 따르는 놀라운 규칙성을 띠었다.

켜켜이 내려앉은 어둠을 책갈피 넘기듯이 챕터를 부여하는 음악의 동작은 하루의 성실한 마감을 즐겁게 위로하는 부드러움과 달콤한 속삭임이 들어있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제목이 뭐였더라?

예전에 여자 화장품 광고 배경음악으로 쓰였던 것 같은데..

연주는 리처드클레이더만 피아노 연주가 분명하다. 

그의 연주 음악을 하나하나 샘플 듣기 하였다.

열 곡쯤 넘겼을 때 오매불망 갈망하던 바로 그 음악이 흘러나왔다.

제목은 '어린 시절의 추억(Souvenirs d'enfance)'


도입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회상을 연상시킨다.

이윽고 물방울이 부서지면서 동심에 젖은 마음은 입가에 포근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막대사탕같이 달달하고 행복한 추억이 연달아 떠오르면서 순수했던 그때 그 웃음소리, 골목으로 줄행랑치던 달음박질, 엄마가 부르는 소리, 저녁 굴뚝 연기, 멍멍이 소리, 퇴근길 창고 앞에 자전거를 철컥 세우던 아버지 소리, 뒤뜰을 누비며 감꽃이 하얗게 떨어지는 소리, 옷장 깊숙이 들어있는 스타킹 치마를 꺼내어 입고는 앞마당을 요리조리 뛰어다닐 때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소리, 해마다 여름이 돌아오면 뜨겁게 달궈진 돌멩이들이 따갑게 콕콕 찌르는 바닷가를 맨발로 한참이나 걸어가야지만 나타나는 한재 해변 파도소리...


엄격한 집안 분위기에 울고 웃으며 내 동무처럼 샐쭉하게 서쪽 하늘 수없이 떠오르던 초승달과 사금파리 조각 깨뜨리던 동해 보름달, 지금의 나를 키운 그 하늘이 빙빙 맴돈다. 감미로운 그 음악과 함께.

어느덧 중년에 이른 나는 간직하면 좋을 동심을 많이 잃어버렸다. 

뾰족하게 모난 세상이 동심이 부푼 풍선을 찌르고 또 찔렀다.


구겨지고 상처 투성이 동심을 탱탱하게 복원시켜 주는 마법과도 같은 음악 '어린 시절의 추억'을 밤이 깊어지는 아웃렛, 피노키오와 피터팬이 함께 살아가는 네버랜드에서 우연히 만났다. 

샛노란 개나리 꽃가지 위에 연노란 나비가 나폴나폴 날아다니는 봄동산을 뛰어다니는 어린 시절은 언제 떠올려도 마냥 행복하다. 영롱한 무지개 걸린 저 하늘 멀리 사라졌을지라도.. 둥근 문고리를 잡아당기면 언제나 열리는 그 문은 내 안에 영원히...








피노키오와 피터팬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네버랜드는 동심 안에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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