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 계열 색조가 모노톤으로 펼쳐지면 공간은 무제한 확장된다.
비 내리는 호수가 그렇다.
작은 물방울이 실시간 튕기는 캔버스를 수천 장 수만 장 잇대어 놓은 수면은 거대한 빙판으로 변하였다.
지금 내리는 오월 마지막 봄비는 빙판 위에 부딪혀서 부서지는 중이다.
고공에서 떨어져 가속도가 붙은 빗방울이 빙판에 작은 흔적을 내고 산화하면 호수는 너그러이 그 작은 분신을 품어서 몸집을 키운다. 맑은 날보다 더 멀리 멀어진 저 건너편 건물들이 신기루처럼 아득하게 밀려난다.
금계국 삘기 새하얀 개망초 여름꽃들이 부드러운 빗줄기에 하염없이 흔들리는 길을 걸으며 움직이는 지붕으로 변한 우산과 빗방울의 협주를 감상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듣던 장독대 빗소리 처마밑 빗소리 숲속 빗소리 연못 빗소리 등 숱한 빗소리를 청하며 불면증을 다스렸건만 한낮 빗속에 들어가서 직접 듣는 빗소리는 빗방울을 하나씩 채집하면서 잡념을 하나씩 지우는 잡념 지우개 역할을 한다. 빗방울의 목소리를 들으며 걷는 행위와 풍경만이 남아서 서로 조우하며 길에 더 집중하도록 만든다.
우산 그림자보다 먼저 나가는 발등은 비에 젖어 질컥거리고 길바닥 웅덩이를 피하기 바쁜 신발은 보기 좋게 지저분해졌다. 그래도 좋다. 습기를 머금고 회색으로 변한 우중 산책은 인적이 드물어 더 고요하고 즐겁기만 하다. 이렇게 궂은 날씨에도 보송보송한 땅이 있다. 호수 위를 지나는 고속도로 아래 땅은 언제나 비를 피한다. 거기 자라는 풀들은 그게 다행인지 재앙인지 모르겠다. 비를 맞을 수가 없으니 물을 마실 수가 없는 형편인데 다행인 건 개울물이 고여서 갈증을 해결하는 걸로 보인다. 궂은 땅 못지않게 생육이 활발하다.
교각 아래 마른 벤치에 앉아서 습기를 잠시 날린다.
폰을 열었더니 동생이 보낸 사진이 여러 장 들어와 있다.
노란 장미 꽃다발을 안고서 그윽하게 향을 맡는 아버지 모습이다.
순간 찡한 감동의 눈물이 솟구친다.
전날 이 꽃다발을 들고서 인천공항에 갔었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서 외국 사는 동생이 급히 입국 여러 날 아버지 곁을 지키다가 출국하는 날이었다. 피곤이 가득 쌓인 막냇동생 품에 안긴 노란 장미는 환송의 꽃다발이 되었다가 간병하러 가는 서울 동생에게 들려주었다. 알레르기 유발 소지가 있는 생화 꽃다발은 병원 문병 시 가져가면 안 되는 물품 취급받는다. 그럼에도 장미의 계절 오월이 다 가기 전 노란 장미를 아버지께 보내드리고 싶었다.
몇 해 전 봄날 고향 화단에 노란 장미 화분을 데려가서 심었었다. 붉은 장미도 같이 심었는데 이상하게 노란 장미의 생육이 왕성하여 붉은 장미를 누르고 키가 무럭무럭 자라났다. 노란 장미는 이듬해 봄 담장 높이만큼 자라나더니 향기로운 제철 꽃을 아름드리 피우고도 여름 내내 가을까지 복스러운 꽃들을 피워주었다. 꽃잎 수가 많아서 토실토실하면서 재물복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여러 번 내게 전화하여 장미가 너무 탐스럽고 아름답다고 좋아하셨다.
그 장미가 지난겨울을 지나면서 갑자기 시들어버렸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봄이 와도 꽃을 피우지 않는 노란 장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봄부터 병상에 누워 계신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랑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음을 직감한 장미는 지난해를 끝으로 생을 포기한 건지도 모르겠다. 올해 오월은 눈이 부시게 푸르렀다. 푸른 하늘은 오렌지색 밝은 태양을 미세먼지 없이 천성적인 모습으로 드러내었다. 눈이 부시게 쨍한 광선을 아버지 얼굴에 쬐게 해 드리고자 병실 창가 베드로 옮겨드렸다. 환한 광선이 멜라토닌 엔도르핀 세로토닌 같은 행복 호르몬을 아버지 몸에서 꺼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이 갈수록 식음을 전폐하는 아버지께 향기로운 노란 장미를 가져가면 잠시나마 기운이 나지 않을까.
꽃말 '영원한 사랑'을 의미하는 노란 장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향기를 맡는 아버지 모습에 내리는 빗소리가 음소거되면서 울컥하였다. 그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꽃향기를 선물하면서 사람들은 말로는 꺼낼 수 없는 마음과 감정을 전달한다. 계절을 오가며 지상에 피고 지는 꽃들은 인간의 희로애락 감정에 충실히 따르는 동반자 아닐까. 불쌍한 인간들의 눈물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신이 마련한 갸륵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 셋째 딸로 태어나게 해 주신 인연에 감사드리며 이번 생을 끝으로 아버지와의 인연이 끊어진대도
그 사랑만은 남아서 바람으로, 빛으로, 꽃으로 우주 곁에 영영 맴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