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땅거미를 밟으며 봉정사로 향했다.
월영교 앞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왜 그리로 가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절박한 마음을 안고서 거기 가면 부처님이 기꺼이 들어주실 거라는 한가닥 믿음이 있었는지도...
일주문을 지나 화강석이 성글게 박힌 돌계단을 밟고 고색창연한 만세루에 신발을 벗고 올랐다.
석양에 물든 저녁 구름이 분홍색 연꽃으로 피어나서 누각에 걸리었다.
옛 수행승과 수많은 사람들이 쓰다듬은 회갈색 빛바랜 나무 기둥을 안고서 굽이치는 천등산 능선을 굽어본다. 거대한 봉황이 꿈틀거리듯 녹색 깃털이 일렁인다. 저 산은 무거운 하늘을 이고서 무너지지도 가라앉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세월을 연주하는 악기가 되어준다. 저 능선에 바람은 현을 긋고서 깊은 울림을 내고 구름은 운집하여 빗물을 만들고 태양은 굴러 굴러 시간을 만든다. 거기 한순간 가닿은 사람들의 시선은 영원을 본다.
저녁 예불이 막 끝난 대웅전에 들어서자 아주 아름답게 생기신 부처님이 좌정해 계셨다.
세상 가장 어두운 곳부터 천상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곳에 이르는 빛처럼 굽어 살피시면서도 엄하지 않고 인자하신 모습으로 그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보셨다. 부처님은 아실 것이다.
이 중생이 어떤 근심을 가지고 찾아왔는지를. 삼배하면서 마음속 응어리를 하나씩 아뢰었다.
가볍지는 아니하고 조금은 누그러진 마음을 어둠에 묻혀 산사를 내려왔다.
절에 올라갈 때 오른편 눈여겨보았던 흙집 펜션으로 오늘밤 거처를 삼기로 했다.
주인장은 시내에 거주하여 한참 동안 불 꺼진 툇마루에 우두커니 걸터앉았다.
모내기를 앞둔 시골 산동네 개구리들 소리가 와글와글 정겹다.
오월의 시작과 더불어 짙어지는 녹음, 비릿한 습기, 나뭇잎을 뒤척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진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묻어난다. 그걸 용케 알고서 개구리들은 이 저녁의 음률을 노래 부른다.
산골이 깊어서일까. 너른 들판에서 들리는 고향집 개구리들과는 음색과 음정이 다르게 들린다.
봉정사 목탁소리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목청이 더 깊고 우렁차고 세속에 찌든 귀를 씻어주는 청정함이 들어있다.
흙집은 동그란 방이 세 개 붙어있고 각 방마다 이층 다락방이 딸려있다.
도자기 인삼주 짚공예품 오래된 풍금이 놓인 민속박물관 같다.
그중 가장 아늑해 보이는 방에서 개구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곯아떨어졌다.
새벽 세 시 아버지가 갑자기 유언을 남기신다는 동생 전화에 잠이 깨어 영상통화를 하고는 눈물 콧물 찍으며 잠을 못 자고 안동으로 내달렸었다. 동창이 밝아오는 새벽 황토가 내뿜는 원적외선이 무슨 힐링을 했는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내 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개운함으로 정신이 맑다.
싱크대 수납장을 열자 라면 몇 봉지가 들어있었다.
이걸로 아침을 해결할 참인데 반찬을 어떻게 준비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편의점은 멀고 집 주변에 무슨 나물거리 자라지 않을까 싶어 밖으로 나가서 두리번거렸다.
산기슭에 연한 취나물이 수두룩 자라고 있었다. 그걸 한 움큼 뜯어와서 데치고 옹기에 담긴 소금과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쳐서 한 보시기 내었다. 하루아침에 깊은 산골 살아가는 자연인이 된다.
푸른 오월의 봄비를 우산으로 받치며 봉정사로 다시 향했다.
어스름이 스며든 산사를 제대로 누비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추적추적 젖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비에 젖은 연등이 새초롬히 걸린 산사로 가는 길은 허리를 굽힌 나무들이 예스럽고 산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확인된 극락전 앞마당에는 제철 맞은 작약이 둥근 꽃봉오리 꽉 다물어 앙증맞다.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이 질 때까지 봄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는 작약은 생김새 빛깔이 아름다워 예나 지금이나 사랑받는 꽃이다. 작약은 알까. 자신들이 피어나는 계절, 오월이 얼마나 싱그러운 계절인지. 뻐꾸기 개구리가 울면 작약의 통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비명을 내지른다.
영산암 바위 위에서 자라는 반송 주위에 돌탑을 쌓아 올리고 절 처마를 따라 걸으며 깃털 젖은 제비처럼 비를 피한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이끼 낀 삼층석탑도 풍상에 깎인 석불도 하염없이 비를 맞는다. 내리는 비를 아무 분별없이 맞는 저 처연함이 불심이 아닐는지.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인간심을 묵묵히 경계해주시는 것 같다.
고통의 바다에 뜬 연꽃 한 송이 피어나려면 거친 장대비가 두드리고 지나가는 긴긴 세월이 필요한 것이다.
기와지붕을 따라서 모인 빗물이 처마 끝에 떨어져 동그란 흔적을 팬다. 절 마당에 보조개가 생기면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웃음이 피어난다. 그 흔적은 연꽃무늬 수막새를 연상시킨다.
아, 저 가지런한 웃음이 출렁거린다. 빗물이 모여 모여 이렇게 수군거리는 웃음을 자아낼 줄은 미처 몰랐다.
그 모습에 취하여 한참이나 바라본다.
산 아래 경사진 암자에서는 고인 빗물이 실개천처럼 모여서 낙수가 떨어질 때마다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마치 누군가 지붕 위에서 작은 돌멩이를 던져서 파장이 이는 모습이다. 그 물결이 예뻐서 또 정신이 팔린다. 작은 동그라미가 퍼져 더 큰 동그라미가 생기고 그 동그라미가 밀려나서 더더 큰 동그라미가 생기고 마침내 빗물은 흘러 흘러 아래로 밀려 계곡으로 시냇물로 강물로 바다로 세상 여행을 한다. 위대한 빗방울의 여정이 시작된다.
하나의 빗방울은 보잘것없지만 모이고 모이면 땅을 패듯이 지성이면 감천하는 그 작은 마음들을 쌓고 또 쌓아서 하늘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을까.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미묘한 것들은 또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부처님께 빌었던 그 간절함으로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께 향한다. 아버지 손을 잡고 온기를 전해드렸다. 밤새 기침하는 아버지 옆에서 하룻밤 병상 곁을 지키고 나면 잠 한숨 못 잔 내 얼굴은 십 년이나 늙어버린다. 그래도 좋다. 아버지가 조금 더 연명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남아있는 오월, 젖은 눈물이 번지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