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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Apr 09. 2024

벚꽃과 별꽃

희뿌연 신작로에 서서 바람을 정갈하게 마름질, 유년의 초록색 추억을 입히던 미루나무가 뽑혀나가고 벚나무가 심긴 이후 단 한 번도 고향 벚꽃을 두 눈에 담아본 적이 없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사월에는 고향을 찾지 않았다. 집 근처 꽃들을 놔두고 굳이 먼 길을 갈 일이 없었고 아이들이 자라날 때는 중간고사를 앞둔 시기라 시간이 나지 않았다. 


이 봄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봄 내가 사랑해야 할 벚꽃은 내 집 앞 벚꽃이 아닌 고향 벚꽃이어야 했다. 

마음을 그렇게 먹고 나니까 집 앞 벚꽃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매정하게 시선을 돌려버렸다. 


준비해 간 오이소박이 메추리알조림 신선한 상추를 넣어 버무린 도토리묵무침을 아침상으로 차려냈다. 일주일에 한 번 유공자 사무실 출타하는 것 말고는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를 모시고 벚꽃 구경을 간다. 우람한 벚나무가 도열해 있는 그 길은 밥맛 좋은 식당 근처라 점심에 솥밥 정식을 먹고서 휠체어를 꺼내 아버지를 태우고 그대로 거닐기 좋은 데크길을 걸었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늘그막 부모님 수족이 되어주는 오빠가 아버지 휠체어를 밀어드렸다.

바퀴 달린 아버지 휠체어가 저만치 앞서가면 걸음이 느린 엄마는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따라왔다. 나는 엄마와 보조를 맞추며 걸음을 늦추다가 방실거리는 꽃들의 웃음에 취하여 걸음을 멈추곤 했다.


불영계곡에서 흘러온 맑은 물이 흐르는 천변에는 노란 유채꽃들이 피어나서 파스텔톤 고향의 봄이 눈가에 간질간질 아른거렸다. 그 길을 걸으며 말수가 부쩍 없어진 아버지 곁에 가까이 붙어 따르지 못했다. 내 기분에 취하여 사진만 찍어댔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이따금 불어와서 기분이 살랑거렸다. 이대로 느끼고 취하면 새로운 추억으로 직행하는 꽃길이었다.


잘 드시고 고운 꽃구경을 한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군 채 잠이 드셨다. 어디를 가나 꽃 융단이 깔린 이 봄, 꽃들도 과하면 지치나 보다. 소쿠리를 들고 나물 채집에 나섰다. 남편이 말하길 나처럼 까다로워서 아무 데나 자라지 않는다는 달래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쑥을 한 움큼 뜯었고 산기슭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돌나물을 채취하였다. 엄마가 산골 할머니에게 부탁해서 뿌리째 심어놓았다는 부지깽이나물은 이제 막 싱그런 잎사귀를 펼쳐 보였다. 이 귀한 나물을 참기름에 조물조물 무쳐서 저녁상에 내었더니 잃었던 입맛을 되살려준다. 


벚꽃은 밤에 보아야 제멋이다. 정신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벚꽃은 햇빛을 얹은 대낮에는 명료하고 환한 이성의 지각을 열어주고, 깜깜한 밤이 되면 스스로 빛을 내면서 숨겨진 감성의 실타래를 살살 풀어준다. 셀 수 없이 수많은 꽃송이들이 꽃등불을 밝히면서 나뭇가지에 얹혀 밤길을 비춰준다. 그 희붐한 빛은 밤의 여로를 비추면서 설익은 감정을 확신으로 이끌고, 이 순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하고 진실한 순간임을 속삭인다. 


양쪽에서 맞닿으려 손을 뻗은 꽃가지들 사이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저 푸른 일곱 개의 별들이 광활한 밤하늘의 여백을 소곤소곤 점찍는다. 섬세한 감성의 결로 빛이 찍어놓은 점자를 고대문자 해독하듯 더듬어 읽는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향기로운 빛의 언어를 벚꽃들은 알고 있을까.


서쪽 산마루에는 오리온자리 삼 형제 별이 한 획을 그으며 반짝거린다. 뱀자리는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는 전설의 의사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신비의 약초를 알게 해 준 뱀을 기리려고 만든 별자리이다. 어느 날 아스클레피오스는 친구 집에서 뱀을 한 마리 죽이게 되는데 이때 놀랍게도 또 다른 뱀이 이름 모를 약초를 물고 와서 죽은 뱀에게 붙여 살려내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약초를 알아낸 아스클레피오스는 그것을 사용하여 병을 고치고 죽은 사람도 살려냈다고 한다. 


어느 별에게 물으면 신비의 약초를 알려줄까?

바리데기가 되어 서천을 떠돌며 물어 물어 가면 살살이꽃 피살이꽃 숨살이꽃을 구해올 수 있을까?

최장 일백 년 설계된 인간의 수명을 무슨 수로 늘릴 재간이 있단 말인가.


그간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밤하늘의 물기를 주워 담는 국자 생김 북두칠성을 바라봐왔다. 봄하늘 북두칠성은 우리 집 마당 바로 위에 떠서 무슨 메시지를 건네줄 듯 무섭기도 하고 신비로워 보인다. 테레비도 안 보시고 종일 잠에 드신 듯 사월에 찾아온 자식 얼굴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다. 아침에 기상하면 머리를 단정하게 빗질하고 향수를 뿌리고 지인들 만남을 좋아하던 활기 넘치신 아버지 모습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푸른 하늘 속에 박혀 7일 동안 하늘거리는 벚꽃을 고개 들어 탄성을 내지르며 감상하는 건 내년에도 다시 볼 수 있는 기대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다. 휠체어를 타고 앞서 가는 아버지의 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내년에도 살아서 이 벚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무상(無常)에 잠긴 아버지 심정은 얼마나 헛헛하게 무너져 내렸을지... 뒤늦은 슬픔으로 먹먹해진다.


고목이 된 벚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화사한 꽃을 피우며 되살아나는데 쓰임을 다한 아버지 다리는 물기가 바짝 마른 고목이 되어 힘을 잃었다. 6.25전쟁 포로가 되어 북으로 행군 또 행군 압록강변 만포진에서 구사일생 살아서 돌아오시고, 기나긴 인생길 흐트러짐 없이 올바르게 걸어온 아버지 다리는 위대한 다리이다. 별꽃이 되려고 자꾸만 눈이 감기는 아버지를 보면서 서서히 이별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다. 인간의 육신은 영적으로 소생한 별꽃이 되어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어떤 인연의 결로 맺어져 다시 환생하지 않을까. 아버지 딸로 태어난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걸은 벚꽃길!

이 세상 마지막에 이르는 아름답고도 슬픈 배웅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아닌 이 세상 오직 하나뿐인 아버지 딸로 태어나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역사의 격변기 태어나서 몸고생 마음고생 이루 말할 수 없이 다 하신 우리 아버지의 삶을 북두칠성은 저 하늘에 빛떨기 문자로 다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고통 없이 아버지를 고이 모셔갈 것이다. 

아, 아버지를 어떻게 떠나보낼지 막막하다.








논머리에 돋아난 돌미나리
산에서 마주친 현호색
벚꽃과 북두칠성
서쪽 동산 오리온자리 삼형제 별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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