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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19. 2024

가을이 온다, 가을이 왔다

 담장에 매달린 담쟁이들이 식을 줄 모르는 열기에 지쳐 시들어 떨어지는 9월 늦더위는 가을을 건너뛰기할 참인지 계속해서 고삐를 바짝 잡아당긴다. 이제 그만 느슨해져도 되련만 퇴장을 기다리는 매미도 이상기후를 눈치챘는지 힘 빠진 허스키 보이스 불쌍하다. 도시에서는 숨은그림찾기 하듯 무성한 녹음 사이로 애써 물든 나뭇잎 하나 발견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어우러져 우주와 호흡을 함께 하는 시골은 달랐다.


 투명한 무지갯빛 햇살을 얹은 태백준령 산등성이는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손님을 맞이하듯 어떤 기대감으로 까치발을 디뎌 더 높아져만 갔다. 설렘을 가득 담은 산봉우리 사이사이 드리워진 음영은 오월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산마루는 상기된 빛깔이 드문드문 눈에 띄면서 설레발 골짜기에는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절제된 균형감각이 돋보였다. 산맥의 미묘한 움직임을 살펴보는 하늘은 모든 분위기를 주관하면서 청옥빛 맑은 얼굴에 새하얀 뭉게구름을 장난스레 묻혀놓았다. 입가에 어렴풋이 없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구름들이 힐끗 곁눈질하며 흘러간다.



 이처럼 상냥하고 너그럽고 사랑스럽던 날씨는 봉화를 지나고서 울창한 금강송 군락지로 들어서자 가는 빗줄기를 그어대기 시작했다. 허연 운무가 드리워진 산은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 말수를 잃었다. 점차 해양성 기후로 변한 날씨는 온도가 뚝 떨어져 27도, 서늘해졌다. 아침에 재잘대던 여인이 저녁이 되면서 우울 모드 급변하는 조울증 날씨 따라 마음이 숙연해진다.


 다음 날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닷물로 막 세수한 아침 태양이 수평선 위로 말갛게 떠올랐다. 차 안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빨래바구니에 담아서 가져간 붉은빛 도는 황금국화를 아버지 산소에 이른 아침 심어드렸다. 꽃을 피우지 않아서 내 마음을 졸이게 만든 배롱나무도 한 송이 기특하게 피어나있었다. 잔디가 아직 덜 뿌리내린 산소 뒤 언덕에는 좋아하는 달개비들이 파랗게 꽃방석을 지어놓았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곱게 물든 꽃천지, 아버지는 지금 행복하시다!!



 'Dolannes Melodie'를 들으며 이슬이 내린 들판길을 걷는다. 벼들이 익어가며 고개 숙인 논둑길을 따라서 야생화들이 소담스레 피었다. 누가 씨를 뿌려 정성스럽게 가꾼 듯이 피어있다. 지난달에 몇 송이 마주쳤던 나팔꽃은 그새 일가를 이루어 무더기로 피어났다. 야트막한 언덕이 나팔꽃이 켜놓은 보랏빛 알전구로 환하게 빛이 난다. 알곡을 내어주어 고마운데 아리따운 모습까지 갖춘 고향 들판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느지막이 아침 숟가락을 놓자마자 상명하복 명이 떨어졌다. 일곱 종류 전부침이 시작되었다. 날은 덥고 기름냄새에 전(쩔은) 이 고단한 작업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건강에도 이롭지 않은 기름뭉치 음식을 왜 장만해야 하는지 저변에서 끓어오르는 발열점 불평은 화목을 위해서 일찌감치 토닥토닥 잠재웠다. 기쁜 마음으로 싣고 와서 산소에 심은 국화를 보면서 "너는 심으려면 여러 개 더 심어놓지 이것밖에 안 심었냐."라고 타박하는 소리마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냈다.


 MZ세대에겐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명절문화 어쩌면 우리 세대가 마지막이 아니겠나. 차 막히는 귀성길 인내심을 발휘하며 어여쁜 모습만 눈에 넣어가며 달려왔건만 너무나 이질적인 심성을 짜 맞추기 위해 이리저리 삐거덕거리는 가족의 연결고리마저 이젠 약해질 대로 약해져 버렸다.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충돌하는 명절이라면 숭배하는 제사도 언젠가는 외면받게 된다. 교통분산 기능이 탑재된(?) 내비게이션의 음성을 따라서 귀경길에는 영동고속도로로 달렸다. 서쪽으로 향하는 어둑해진 저녁 하늘에 갑자기 오른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분홍빛 노을에 물든 그 손은 손목에서 손가락 끝까지 한 줄기 뚜렷한 선을 그어놓았다. 근육으로 다져진 팔에서부터 뻗어간 그 선은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보였다. 온정의 맥박이 펄떡이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그 손을 향해 차 안에서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오른손, 나도 오른손. 우리는 하늘과 땅 중간에서 만나 악수를 하였다.


 서로 가볍게 팔을 흔들자 구름으로 만들어진 그 손은 너무나 부드럽고 촉촉하고 따스한 촉감이 느껴졌다. 환영과 작별 두 가지 인사를 전하는 그 손의 전갈을 읽기 위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너무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아서 다시 힘을 뺐다.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과 손가락이 만나 전류가 흘렀다. 그 손을 놓치기 싫어 계속해서 손을 잡았다. 내 손에 꼭 맞는 구름손도 억지로 손을 빼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아, 그 손은 명절날 수고 많았다며 하늘에서 내미는 아버지의 포근한 손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번졌다. 서운하고 피곤하게 얹혔던 눅진한 감정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나를 달래주던 아름다운 구름손은 시속 110km 달리는 길 끝에서 사라지지 않고 한참 동안 작별인사를 하더니 작은 노을 구름으로 서서히 흩어졌다. 안녕, 구름손 잘 가! 손을 흔들었다. 잿빛 구름이 몰려온 하늘은 금세 어두워졌다. 뭉클하게 데운 가슴속에서 붉은 끝동 적시며 성큼 가을이 스며들었다.




 


고향 집 논, 대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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