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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우 Sep 26. 2024

돌사람


명동 뒷골목 가을비 젖은 길을 따라서 시곗바늘이 거꾸로 돈다.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말 블루 무드에 취한 젊은이들은

복고풍 유행을 입고서 '잘못된 만남'이 울려 퍼지는 거리를

따분하고 암울한 표정으로, 엇박자 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지나갔다.

서기 이천 년이 되면 해저 대륙붕이 붕괴되면서 바닷물이 계단식 폭포수가 되어 흘러가고

검은 태양이 사흘 밤낮 이어져 암흑세상이 도래한다던 예언가들의 불길한 종말을

비웃듯이 밀레니엄베이비들은 아무 일 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


점포 바깥 내놓은 물건들을 덮어놓은 비닐커버 위에

외상값처럼 주룩주룩 매달린 빗방울을 재수 없다는 듯 상인이 털어내는 순간

신발 속으로 물기가 질퍽 차올랐다.

정각 11시, 약속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걸음을 서두를 때마다 요동치는 지표면 빗물을 저벅저벅 밟으며

도포자락 휘날리는 어떤 사람이 내 우산 속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거 우산 좀 같이 씁시다."

행색을 보아하니 빈대떡 사 먹을 돈도 없는 유생 같았다.


쯧쯧 일기예보도 안 보고 다니시나?

거추장스러운 그 옷차림은 또 무엇이오?

지하철역까지만 씌워주기로 했다.

일인용 우산을 둘이서 나눠 쓰니 어깨가 조금씩 젖기 시작했다.

키가 훌쩍 큰 그는 우산 밖으로 한쪽 어깨를 아예 내놓고 걸었다.

안쓰러웠지만 모른척했다.

지하철역에 도착한 그는 그 흔한 카드 한 장 없는 것 같았다.

주머니를 탈탈 털어 꺼내 보인 거라곤 가운데 구멍 뚫린 오래된 엽전 한 닢.


아니, 교통카드도 없단 말이오?

청학동에서 막 상경한 것이오?

흠뻑 젖은 모습이 누추하여 무어라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목적지가 어디시오?

한성대입구역입니다.

그렇다면 날 따라오시오.

여유분 카드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찍고 카드를 잘 챙기시오.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한결 여유를 챙긴 그는 내 옆에 바짝 붙어 흔들리는 손잡이를 꽉 붙잡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참인지 물어봐도 시치미를 뗀다.

이제 카드 주시오.

빈털터리이거나 말거나 나는 모르오.


오늘 만나기로 한 문인들은 이미 입장한 터

간단히 둘러보는 야외박물관 입장권을 끊었다.

초록색 이끼가 내려앉은 석등이 아득한 세월을 비춰주는 정원에서

옛 복식을 차려입은 여인들이 두 손을 소맷부리에 공손히 감추고서

다소곳이 마중 나와 있었다.

검버섯 핀 사신도 호방하게 웃음 지었다.

달개비 꽃무릇 함초롬이 피어나서 보슬비 맞는 동산에는

지장보살 미륵불 비천상이 하늘을 날아다녔다.

속세인지 신선세계인지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감미로운 향기가 스며들어 정신이 아찔했다.

엄마 품에서 나는 달큰한 복숭아향 같기도 하고, 천 년 된 고목의 껍질에서 나는 나무향 같기도 하고,

향유고래가 뱉어놓은 바닷속을 떠다니는 용연향 같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아시오?

뒤돌아보니 싱긋 미소 짓는 유생이 자기는 이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명동길을 혼자 걷는 내 모습이 이리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길동무해주었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혹 나 몰라라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고 말한다.

확 변해버린 서울 교통편을 몰라서 쩔쩔 진땀 빼며 헤맸다고 한다.


"여기 있는 돌사람들은 변치 않는 신념을 지켜내고자

아침에 해놓은 밥 초저녁에 쉰밥 되는 세월 속에 우뚝 서 있답니다.

저 차가운 돌 아래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라오.

그들이 묻습니다.

당신의 신념은 무엇이오?"


갑자기 훈장이 돼버린 유생 앞에 내놓을 답변이 궁색해졌다.

이번 여름이 백 년 묵은 구렁이 담장 넘어가듯 너무 길어서 더위를 먹는 바람에 정신이 잠시

몽롱해졌어요.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인심 좋은 길상사에서 비빔밥 떡 바나나 점심공양을 은혜 입고서

붉은 오미자차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보잘것없는 나의 신념과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살아오진 않았던가.

얄팍한 공감과 위로 그런 걸 바라진 않았다.

그냥 물처럼 흐르고 스며들면 그만이다.

막히면 돌아서 가고 겸손하게 흘러 흘러

나의 세월이 밴 마지막 얼굴은

거짓 속임수에 찌들고 일그러진 내력은 아니어야겠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인류애가 근저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옅은 사랑이 남는다면 돌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라고 말하려는데

유생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마시다 만 찻잔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처음 보는 커피는 쓰니까 만류하였건만 기어코 마시고 싶다고 시키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몇 모금 마시다 반도 못 비우고선 자리를 비웠다.

아마 그는 옛돌박물관 정원을 지키는 돌사람 속으로 들어갔나 보다.

전부터 알고 지낸 문인들과 함께 한 자리

이상하게 명동에서부터 줄곧 따라온 돌사람과 얘기 나누고

친밀한 시간을 보냈다.

나처럼 지각해서 헐레벌떡 뛰어온 가을은 고작 두 달

우리에게 인색한 시간을 주었다.

돌사람이 말한 신념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애쓰는 가을이고 싶다.








가을비 내리는 날에, 옛돌박물관 정원에서 마주친 정겨운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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