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물어 붉은 노을에 어둠이 배어들면 신비로운 보랏빛을 드리우듯 여러 사람의 인생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사진을 모아놓은 고향집 앨범도 보라색이다. 잔잔한 추억 같은 보라색 물방울이 연달아 피어오르는 무늬가 새겨진 표지는 견고하여 꽤 두꺼운 페이지를 여민 금색 스프링을 속살에 간직하고도 전혀 해진 데가 없다. 경외심으로 묵직한 표지를 넘기노라면 비닐커버 아래 접착된 사진들이 노쇠해져 가는 시간을 꽉 붙잡기라도 하듯 늙음을 모른 채 젊고 초연하다. 언제나 봄이 한창인 앨범을 열어보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다.
거기 수많은 사진들 중에 내 눈길을 십여 초 멈추게 하는 사진이 있다. 지금까지 그 사진에 눈길이 멈춘 시간을 합치면 열 시간쯤 되지 않을까. 때는 1969년~70년쯤, 망망대해를 함께 헤쳐가는 위대한 여정을 앞둔 신랑신부가 결혼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언제 바라봐도 멋지다. 짙은 눈썹 아래 굵고 진한 쌍꺼풀 오뚝한 콧날 언행에 신중한 입술이 조화롭게 생긴 서구적 외모의 새신랑 옆에 꽃화관 베일을 쓰고 자수가 새겨진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앳된 신부가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다. 단아한 인상의 새신부가 손에 쥔 부케가 독특한데 바닥에 닿을 듯이 기다랗게 늘어뜨린 아스파라거스가 드레스 치마에 너울져 생동적이다.
신랑신부 뒤로는 제철 국화가 만발하였고 꼬리 깃털을 포개 서로 마주 보는 암수 봉황이 백년해로 언약하는 새신랑신부를 축복하고 있다. 흑백사진이어서 더 돋보이는 신랑신부의 외모와 경건하고 신성한 결혼식 분위기의 표본 같은 이 사진은 자부심을 안겨준다. 나도 신성일 엄앵란 못지않은 잘생긴 사촌오빠와 새언니가 있다는 자부심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름다운 관문을 통과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지난해 가을 사촌오빠가 편찮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뵈었을 때 새언니는 시집에 처음 인사 가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멀고 먼 시집 대관령 비포장 고갯길을 내려와서 하룻밤 자고 가는데 거울을 보니 마스카라 바른 속눈썹이 온통 흙먼지가 뽀얗게 엉겨 붙어있더란다. 당시 서울에서 시집 가는 길은 꼬박 1박 2일이 걸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결혼식 사진 얘기가 나왔다. 오빠 집에는 이 사진이 없다는 거였다. 보라색 앨범에서 이 사진이 빠져나가는 건 애석하나 우리에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오빠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저번 고향 갔을 때 약속했던 대로 부쳐주었다.
귀공자풍 사촌오빠는 큰집의 자랑이었고 우리 가문의 기대인물이었다. 큰집 어르신들은 그 옛날 소 팔아서 외동아들을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 보냈다. 체신고등학교를 나온 것으로 안다. 당시 하숙집에는 동갑내기 딸이 살고 있었다. 이쁘장한 그 소녀가 지금의 새언니가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 후 오빠는 미국의 통신회사에서 근무하다가 귀국 D건설에 입사하여 중동 붐이 일자 아랍 왕자 같은 외모에 어울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갔다.
어느 날 열사의 나라에서 지는 해를 받으며 은은하게 물드는 초원에 서있는 오빠의 사진이 편지와 함께 동봉되었다. 그 사진이 또 나의 시선을 묘하게 빼앗았다. 먼 이국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을 한 방울씩 샘솟게 만들었다. 아주 가끔 귀국하면 버버리 코트를 입고 007 가방을 든 오빠는 먼지 자욱한 신작로 저편에서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서울오빠가 온다고 큰집 어르신들이 귀띔하면 큰길이 보이는 당나무에 가서 오빠를 기다렸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오빠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서 멋진 모습으로 짜잔, 나타났다.
수십 년의 나이차가 나는 오빠는 통 말수가 없었다. 어린 내게 우상이었던 오빠는 말 붙이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이 두 마디만 겨우 했었다. 우상은 올망졸망한 사촌동생들에게 차가운 사람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유년기 오빠로부터 다정한 말 한마디만 들었더라면 나의 우상은 저 높은 금자탑 위에서 빛났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난사람은 자고로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추운 한강변 서울에서 나는 집이 없었다. 2층 벽돌집 오빠집에서 가까운 골목 단칸방에 살았다. 오빠 가까이 살아야 안심한다고 아버지가 급히 얻어주신 사글세 집이었다. 담벼락에 작은 쪽창 달린 단칸방에서 이를 악물고 살았다. 캄캄한 감옥 같은 방에서 절망을 꿈꾸었다. 나의 우상은 이제 더 이상 우상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말수가 없었고 나는 그가 사는 집에 가는 일이 없었다. 딱 한 번 술 한 병을 들고서 찾아왔었다. 잠시 무직 상태인 것 같았고 플라스틱 쓰레기를 화학적으로 재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의 의식에서 점점 퇴색한 오빠가 아프다기에 껍질째 먹는 사과를 보내주었다. 위중하다는 소식 듣고서 추석 지나고 오빠 집에 찾아갔었다. 그것은 한때 나의 우상에 대한 예의였고 내 청춘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오빠는 많은 얘기를 해주었다. 오빠 살아온 인생 고향에 대한 추억 내가 모르는 아버지 얘기도. 그 얘길 들으며 오빠가 아주 명석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 외모 그 비상함을 양 날개에 달고 한 세상 훨훨 날아다녀도 모자랄 텐데 일찍 날개가 꺾인 거인을 보면서 측은함을 느꼈다.
새해 서설이 내린 주말 거인은 눈을 감았다. 큰어머니 기일이 오늘인데 아픈 아들을 두고 볼 수 없어 천상에서 손길을 뻗어 데려가신 것 같다. 무뚝뚝함 속에 감춰진 자상함을 자신의 한계점에 이르러 꺼내 보인 오빠는 영정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계셨다. 한강변 눈꽃 핀 겨울나무들이 오빠의 마지막 한숨처럼 작별을 고한다. 여한이 많은 이 세상은 그런대로 아름다웠노라고... 살다 보니 잘도 흘러가는 세월이 내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데려간다. 이것 또한 자연인 것을, 눈물을 아껴야겠다. 언젠가는 꼭 필요한 그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