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사계절 중 겨울이 가장 길었다.
긴긴밤 첫닭이 울고도 한참이 지나 희멀건 해가 떠오르면 처마 밑 영롱한 고드름에 부딪힌 햇살이 한두 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에 미끄러져 그 고드름 다 깎아내자면 여러 날이 걸렸다. 벙어리장갑에 언 손을 녹이며 얼음이 쩡쩡 언 논바닥을 미끄럼 타다가 양지바른 담장에 기대 술래잡기를 되풀이해도 콧잔등이 시린 겨울은 끝날 줄 몰랐다.
지금은 겨울이 가장 짧다.
12월, 1월 이렇게 두 달만 지나면 봄이다.
꽁지가 짧은 2월의 새는 봄으로 치닫는 노래를 부른다.
산 아래 졸졸졸~ 시냇물이 겨우내 참았던 숨통을 틔우고,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 곤두박질친대도 2월의 새는 수평선을 건너와서 푸른 해초 한가닥 입에 물고서 부드러운 요들송을 부른다.
우리 눈에는 미동도 없어 보이지만 해빙기 대지는 꿈틀대며 기지개 켜고 단물을 빨아들여 새싹을 내밀 준비를 본격적으로 한다. 손톱만 한 새싹을 내밀기 전 이 고요한 2월의 생동적인 정중동(靜中動)을 좋아한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봄을 앞둔 즐거운 리듬을 탄다.
고요함이란, 소리 나지 않는 기다림이다.
적막과 한숨이 흙더미에 짓눌려 질식하는 고요함이 아니다.
그건 억압이고 저항이며 함성을 동반하는 무서움이다.
고요한 기다림은 아주 작은 숨구멍을 틔우면서 꿈에 부풀어 안온한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고 그 꿈에 취하여 사뿐히 날아올라 어린 왕자의 별에 다녀오고 짙푸른 바다를 헤엄치며 표면 위로 떠오르는 의식 저 아래 무의식에 꽃씨를 뿌린다. 빙산의 일각 아래 고요함이 사무치면 고로쇠나무 끝에 수액이 돈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꾸벅잠 자는 꽃들을 보았다.
엄동설한 1월에 깨어나서 얇디얇은 어깨를 떨고 있는 꽃들이었다.
동지 지나 조금은 누그러진 햇빛이 소복이 고인 밭고랑에서 분홍색 꽃대롱을 나팔처럼 제일 먼저 내민 광대나물꽃을 보았고 바위 아래 추위를 피한 연보라색 꽃잔디 그리고 산등성이 넘어온 오후 볕자락에 철쭉꽃이 다소곳이 봉오리를 내밀었다. 연약한 풀꽃들은 한 겹 홑치마로 모진 한파에 맞서 자신의 빛깔과 개성을 표출하였다. 고달픈 현실을 꿈으로 살아내고 있었다.
현실과 꿈이 서로 어우러져 날갯짓하는 나비와 같이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 날개에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는 가치를 싣고 연민과 동정 사랑의 빛가루가 반짝인다면 눈빛만으로 훈훈해지리라. 오직 현실만 직시하며 표독스럽게 악착같이 살아가는 매과 날짐승의 눈초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현기증이 인다. 그들의 언어는 날것 그대로여서 소화불량에 걸리곤 한다.
입술에 도끼날을 장전하여 듣는 귀를 아프게 한다.
바른말은 침묵을 배경 삼은 심중의 말을 골라서 할 말은 기꺼이 하는 말이다.
축하의 말을 아끼는 사람, 자신의 새해 복은 접수하고 상대의 복은 빌어주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말을 삼감으로써 인격의 비천함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꽃무늬 어룽거리는 창가에서 나는 지난해 11월부터 동백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부터 동그란 초록색 꽃망울 끝에 붉은 끝동이 내비쳤다.
초록색 보자기에 싸여 동그란 꿈을 깊이 꾸고 있었다.
손으로 쓰다듬으며 그 꿈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살살 어루만져주며 언제쯤 깨어날지 기다리고 지켜보았다.
아주 천천히 붉은 꽃잎을 초록색 보자기에서 풀어내며 조심스레 내미는데 출산의 진통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핏빛으로 우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동백은 유리창 바깥에서 나는 유리창 안에서 서로 같은 꿈을 꾸었다.
상온의 베란다에서 지상의 꽃들보다는 빨리 깨어나길 바라면서 춘삼월에는 어여쁜 꽃을 피워주지 않을까.
성급한 나는 미리 동백의 모습을 그려본다.
도톰하게 말린 꽃봉오리의 자태를 보면서 저 힘겨운 진통이 끝나고 나면 겹동백으로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푼다. 아무렴 어떠랴, 한송이 동백이 화들짝 피어나면 나는 동백의 수고로움과 경이로움을 위하여 와인잔을 기울여 경배할 것이다.
2월의 새가 꽁지 깃털을 비구름같이 부풀리면 봄비 내리는 겨울도 끝나간다.
부드러운 미풍은 혹한을 이긴다.
이 절대진리를 굳건히 믿는 나는 사라져가는 겨울을 먼발치로 내다본다.
딥블루 겨울 바다는 바람의 전갈에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잠시도 가만 두질 않는 바람은 바다를 뒤척여 수중에 웅크린 파도를 내쫓았다.
흰 파도는 바다의 생각과 의지로 밤새 기나긴 시나리오를 쓰다가 고독한 빛에 휩싸여 영감이 떠오르는 날에는 맑은 이마 위에 흰구름으로 잔잔한 시 한 편을 완성한다.
겨울 바다는 명작 시 한 편을 창작하기 위해 저리도 격렬한 몸짓으로 너울성 파도를 치면서 골몰하였다.
겨울밤에는 별빛을 보아야 한다.
아무리 추워도 칠흑 같은 밤하늘에 떨고 있는 별빛을 보아야만 한다.
고공을 사이에 두고 저도 떨고 나도 떨고 우리는 빛으로 진동한다.
그리움이 깊다 한들 저 별빛에 비할까.
언젠가는 돌아갈 내 영혼의 고향이 어느 별인지 붉은 별에 물어보고 푸른 별에 물어본다.
그들은 깜박깜박 오래전 떨군 빛으로 파동을 그리며 내 물음에 우주의 가로등 그 너머 너머 미지의 세계로 손짓한다.
오리온자리 삼 형제 별은 밤하늘의 문고리같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그래, 손을 대면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그 문고리를 잡고 언젠가는 저 심우주 어딘가로 찾아가 볼 것이다.
이 난세 아직 살만하다고 꿈을 꾸게 해주는 꽃과 별은 내 꿈의 상형문자, 그들이 말한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왼쪽도 오른쪽도 아니라고.
밀실에 모여서 컴퓨터를 해킹하고 숫자를 조작하는 부정은 더더욱 아니라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세상, 나랏돈을 내 주머니같이 아껴 쓰는 세상, 정사구별에 사견이 끼어들지 않는 세상, 법관의 오른손이 왼손 지렛대에 기울지 않는 세상,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 이 땅의 자유를 위하여 압록강변 만포진까지 끌려가서 얼음 벌판 위에서 땔감을 줍던 내 아버지의 청춘에 부끄럽지 않은 세상.
그런 세상 위로 봄은 공명정대하게 온다.
고운 꽃신 신은 봄처녀에게 미안하지 않은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