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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by 남연우

백지가 된 길을 걷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면서 동결보존되어 포슬포슬하다.

부드러운 눈꽃빙수가 끝없이 깔린 길 위로 뽀드득뽀드득 발자국 찍는 소리가 생각의 빙점을 얼리면서 따라온다. 일자 줄무늬 물결무늬 큐브 모양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힌 길은 보행자들의 걸음을 프린트하면서 눈길을 걷는 내내 발자국 갤러리를 전시한다. 아무도 없는 순백의 설원 위로 오롯이 걸어간 발자국은 한 사람의 인생 행로를 향취를 풍기며 남겨진 발자취 같아서 따르고 싶어진다. 그 발자취는 과거에서부터 현재 미래로 이어져 점선을 긋는다. 현재 시점 자신의 행방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뿐이다.


색과 형상을 지우는 설원을 거닐며 깨끗한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아궁이에 불땐 그을음이 일백 년쯤 그을린 부엌 서까래처럼 살아온 시간만큼 새까맣게 그을린 마음을 탓해 무엇하랴. 지울 수도 없고 벗겨낼 수도 없는 색색의 땟자국 그 위에 밑바탕 색이 드러나도록 검정을 살살 벗겨 그림을 그리자. 초록색 밑그림 위에는 집을 그리고 분홍색 밑그림에는 정원을 붉은색 위에는 검정을 긁어서 밝게 빛나는 태양을 그리자. 내 그을음과 당신의 그을음 위에 웃음을 덧바르며 어둠이 걷힌 새벽의 고요를 응시하자.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날 빗장을 활짝 열어 백지가 되는 기쁨 잠시 누려도 좋으리.


발자국 모양을 살피며 눈길을 내려 걷던 어느 순간부터 눈이 시리다.

순백의 얼음 결정에 반사된 자외선이 눈의 각막을 아리게 했다.

그제야 스쳐가던 사람들이 착용한 선글라스가 떠올랐다.

시선을 들어 옆쪽 작은 습지로 향했다.

텃새로 눌러앉은 왜가리 두 마리가 어깨를 움츠린 채 볕을 쬐고 있고 그 곁에 부리를 치켜세운 민물가마우지 여러 마리가 깃을 세운 검은색 모직 코트를 걸친 듯이 포스를 잡는다. 종이 다른 두 부류의 어색한 만남 또한 영하의 날씨가 만들어놓은 야생의 상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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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아주 예쁜 새들이 둥둥 헤엄치는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와 목에 두른 신비로운 청록색 깃털이 일렁이는 물결에 거울처럼 비치며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갈색 줄무늬가 두 줄 새겨진 등은 하얀 깃털이 촘촘히 박혀있고 부리는 겨자를 묻힌 듯이 노란색.

흔히 보는 청둥오리와는 족속이 다른 우아한 모습을 한 새들에게 눈길이 홀딱 빼앗겨 빙점이 녹은 생각의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일었다. 갈색 볼품없는 암컷들은 저만치 외따로이 떨어져 있고 화려한 수컷 두 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붙어서 헤엄쳐간다. 저 새들은 백조가 되고 싶은 오리가 아닐까.


백조보다 우월한 오리일지도 모른다.

머리와 목에 붙은 청록색 깃털은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저 새들의 잔망스럽지 않은 의지와 고결한 품성이 저런 황홀한 빛깔의 표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갑자기 새의 깃털이 부러워졌다.

내가 좋아하는 청록색 저 깃털 내 검은 머리카락에도 하나쯤 나고 자라면 좋겠다.

일부러 염색을 해볼까나.


자신을 대표하는 색상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 없이 청록색을 택하겠다.

푸른색과 녹색을 섞어놓은 일급수 물은 너무 깨끗해서 물고기가 살지 않는 외로운 물이다.

그 물에 윤슬이 반짝이고 달빛이 부서지고 별빛이 나린다.

물은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스스로 빛나는 물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홍수가 난 황톳빛 강물이나 오염된 물은 이 물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이 물은 산정의 만년설이 서서히 녹아서 우여곡절을 거쳐 흘러내린 물이다.

스스로의 자정작용으로 티끌을 걸러내고 우주의 법칙에 순응함으로써 눈비를 맞고 구름이 되어 자신이 태어난 높은 산으로 되돌아가는 고향을 간직하였다.


그리움이 깊은 물은 녹색을 띠더니 청록색으로 짙어진다.

그 물을 본 누군가는 너무 차갑다고 외면하였다.

그 물가에 살다가는 함께 고독해서 죽을 것 같다고.

또 누군가는 침을 뱉고 지나갔다.

너 혼자 고고하게 잘난 체한다고.

그래서 노는 물은 다 따로 있는 것이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청록색 일급수는 흔하지 않기에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다.

오염수가 섞이기 쉬운 낮은 저지대는 말고 고산들이 즐비한 산 중턱에 있는 걸 선호한다.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볼프강 호수가 그러하였다.

처음 보는 저 이국적인 청둥오리들도 먼 바이칼호에서 날아오지 않았을까.

여기 물은 생활하수를 재처리한 이급수인데도 잘 노는 걸 보면 천성이 낙천적인 새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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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가 얼려놓은 빙판의 모양은 제각각이다.

회오리 모양으로 날개 치는 균열 가운데 태풍의 눈이 뚫린 빙판은 압권이었다.

얼음 위에 백설이 휘날려 초승달이 떠있는 빙판은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수묵화를 그려놓았다.

그 위에서 작은 할미새 한 마리가 걸음을 총총 옮기며 미끄럼 타고 얼음을 지친다.

물에 빠진 키 작은 갯버들 둘레에는 찰랑이는 물결이 동그랗게 얼어서 이 겨울의 크리스털 액세서리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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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둥지를 인 언덕 위 굴참나무도, 새파란 하늘에 살랑거리는 수양버들도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2월의 다리를 건너고 있다. 그 나무다리는 낡아서 나룻배처럼 삐걱거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거린다.

그러나 난간을 붙잡고 건너야만 한다.

다리 저 끝에 당도하면 새움 틔운 버들잎 위로 봄바람이 살살 빗질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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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이 길에도 보행자 전용 다리가 생겼다.

지난해 말 이미 완공되어 언제나 건너볼까 노심초사 기다렸건만 펜스를 치고서 굳기를 기다리는지 보행 허가가 나지 않아 애태웠다. 이 다리를 건너면 둘레길 10킬로 구간이 1.5킬로쯤 줄어들면서 20분가량 시간이 단축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훨씬 가까워진다. 두 개의 다리가 새로이 생겼는데 길이가 긴 제1보도교는 폭 3미터 길이 134미터에 이른다.


이 다리 측면은 새발뜨기 바느질을 누비듯이 세모꼴이 나란히 이어지면서 연갈색 카푸치노 커피색을 띤다.

에둘러 빙 돌아가지 않고 고마운 지름길이 되어주는 예쁜 다리에게 나만의 애칭을 붙여주고 싶다.

빙판 위에서 혼자 뛰어놀던 할미새 발자국을 닮은 '할미새다리' 또는 '카푸치노다리'.


혹한의 겨울 우리는 춥다고서 웅크리는데 깃털 패딩을 입은 새들은 자유로이 노닐었다.

그 새들 중에 목에 두른 청록색 깃털이 유난히 아름다운 청둥오리가 부러운 나는 그 저녁 민트색 줄무늬가 그려진 스카프를 사고야 말았다. 얼음이 풀리는 봄날, 민트색 스카프를 두르고 할미새다리를 더 자주 더 가뿐히 건너게 될 것이다.





image.jpg 혹한의 겨울을 유유자적 호젓하게 떠다니는 2월의 멋쟁이 청둥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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