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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이르는 길

by 남연우


2월은, 떠나는 계절이다.

무딘 햇살 자락에 뭉툭하게 닳아버린 툇마루 끝에 앉아서 겨울잠 자던 실눈을 가늘게 뜨고 해묵은 계절의 껍질을 벗는다. 마땅히 해야 함에도 하지 않았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을 거두는 것이고, 무기력에 대해 보풀처럼 부푼 방어기제를 허무는 것이고, 새 물결에 오르기 위한 가벼움을 준비한다.


때마침 찾아간 대학교정에는 졸업식 인파가 한창이었다.

이전에 썼던 사각모는 퇴물로 사라지고 자주색 귀여운 베레모를 쓴 학생들이 축하 꽃다발을 들고서 포토 스폿 장소를 옮겨 다니며 사진 찍기에 여념 없었다. 정든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보다는 새 출발을 향한 열정에 들뜬 프리지어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떠다녔다. 이십 대 중반 싱그러운 얼굴들이 머금은 웃음꽃이 앙다문 겨울눈 매단 앙상한 매화가지 너머로 봄을 데려오고 있었다.


동장군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요즘 봄은 과연 어떤 길로 걸어오는 걸까.

눈길을 걸었다. 응달에 쌓인 눈이 눌어붙어 반질반질했다. 미끄러워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 걸었다.

주머니에서 슬그머니 손을 뺐다. 미세먼지와 뒤엉킨 차가운 바람이 얼굴 정면에 부딪히며 불어왔다.

마스크를 썼다. 털장갑도 꼈다. 이런 응달길에 미끄러지며 맨손으로 추위를 감싸고 다가오는 봄이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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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가에 얼음물에 잠긴 갯버들이 춥게 서 있었다.

그런데 깡마른 갯버들 군락지에 떠있는 얼음의 문양이 눈길을 끌었다.

잘게 쪼개진 모자이크 타일같이 모서리가 둥글게 마모된 다각형 도형들이 서로 맞물려 멋진 구상화를 그려놓았다. 오각형 육각형 세모 동그라미들이 뾰족한 각을 없애고 얼기설기 돌탑을 쌓듯이 서로 부여잡고 있었다.

내 결점과 네 결점을 허물어 이음새를 만들었다. 갯버들 군락지에만 이런 문양들이 형성된 걸 보면 나무들의 버팀에 가로막힌 빙질이 이런 파상형 무늬를 그리게 된 건 아닐까.


얼음 왕국에 갇혀 절규하는 나무의 의지와 눈물을 읽는다.

참고 참은 눈물은 둥글게 읽힌다. 아무 감정도 없는 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고난에 부닥칠 때 한 사람의 숨겨진 밑바닥이 드러나듯이 물도 마찬가지이다. 물은 바위와 경사를 만나면 오히려 겸손해진다. 자신이 부서져 산화하더라도 모난 바위를 깎고 폭포수가 되어 추락한다. 바람과 만나면 잔잔한 물결무늬 그리며 바람의 방향을 읽어준다. 그리고 영하의 겨울에 이르러 자신의 고독한 내면을 빙판 위에 솔직하게 고백한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군자답게 원형을 주로 그리다가도 나무뿌리 또는 아메바 같은 선율을 그리며 흘러가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근원에 대한 덕목을 말해준다. 얼음은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는 집이요, 그 집에서 꾸는 한겨울 밤의 푸른 꿈이요, 이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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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를 가두는 댐을 지나 호수를 길게 세로로 굽어보는 언덕에서 햇살 싸라기를 움켜쥔 이 겨울의 생존자를 만났다. 그는 로제트 식물 달맞이꽃이다. 방사형으로 펼쳐진 불그스름한 잎이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얼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살아남았다. 바깥에 도열한 잎사귀들은 호위무사요, 한가운데 붉디붉은 잎은 여왕벌처럼 고요하게 소용돌이의 정점에 가라앉은 생존의 열기로 뜨거웠다. 이 언덕은 한여름 밤하늘 아래 달맞이하는 달맞이꽃들의 성채이다. 지금도 일렬횡대 모여서 드낮게 살아간다. 황막한 눈바람 속에서도 꽃은 어디에나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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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길을 지나자 눈이 녹아서 질퍽한 슬러시 길이 나타났다.

걸을 때마다 빙수에 녹은 얼음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마른 신발이 침수될까 안전한 길을 모색하려고 눈이 덜 녹은 길가 하얀 눈을 골라서 걷는다.

봄의 고운 발걸음도 이런 길은 싫어할 것이다.

부디 안전한 데로 굽어살펴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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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 자갈길, 초록색 댓잎 바람이 살랑거리는 대나무 길도 지나 솔가리가 폭신하게 깔린 솔잎길을 지난다. 데크 깔린 다리도 여러 개 지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걷기 싫은 진흙길이 나타났다.

이 길은 피할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

두 줄기 나란히 재빠르게 지나간 자전거 바퀴가 부러울 따름이다.

어쩌면 인생도 어느 구간 진흙길이 아니던가.

걸음은 무거워지고 신발은 더러워지고 바짓가랑이에 흙탕물이 튕기는 그런 구간 걸어가야만 할 때 있다.

어차피 지날 길이라면 마음을 내려놓고 질척거리는 저 점성에 내 발자국을 깊숙이 찍어가자.

볕이 들어 물기 마르고 나면 거칠었던 여정이 선명한 쐐기문자로 내 자취를 증명해 줄 테니.

그리하여 진흙길은 굳건한 이정표가 되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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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파인 웅덩이를 피해 걸어가는데 바로 옆 숲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검푸른 깃털에 윤기가 흐르는 닭이 빨간 볏을 세우고 앞발을 긁어 무언가를 쪼아 먹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낙엽을 헤쳐 걷어내는 소리였다.

닭백숙을 파는 인근 식당에서 산에 풀어 사육하는 토종닭 같은데 꽤 멀리 와버린 용감한 닭이었다.

이 혹독한 계절이 닭에게는 보릿고개 넘어가는 춘궁기였다.

깃털 색으로 봐서는 수탉 같은데 이백여 미터 지나 식당에 이르렀을 때 식당 뒤편 산기슭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수탉의 외침을 듣고서야 암탉이란 걸 알게 되었다. 둘도 없는 암탉이 보금자리를 떠나 안 보이게 되자 다급해진 수탉은 암탉을 연신 불러댔다. "꼬끼오~ 어디 갔어? 빨리 와~ 꼬끼오"

온 산이 쩌렁쩌렁 울렸다.

동물이지만 암탉을 사랑하는 수탉의 애가 타는 마음이 골짜기에 메아리처럼 전해졌다.

그 소리를 들은 암탉은 헤매는 발길을 돌려 단번에 수탉이 있는 보금자리로 즉시 되돌아갈 것이다.

짝이 있어 외롭지 않은 저들의 겨울나기를 응원한다.


그나저나 비단 꽃신 신은 봄의 발길이 이 진흙길에 더러워지면 어쩌나.

개울가에 앉아서 씻고 봄비에 적시며 봄은 여린 걸음 바삐 서둘러 샛노란 산수유나무에 당도할 것이다. 그보다 우리 집 베란다에 먼저 와있다. 결국 찬바람을 마셔 두통이 생기고 먹은 음식을 다 토해버린 나 보란듯이 하룻밤 새 꽃봉오리를 열고 살며시 피어난 동백꽃. 겹겹이 에워싸인 붉은 활옷을 입은 동백꽃을 '가시 없는 겨울 장미'라고 부르고 싶다.


오, 이 기쁨을 주려고 지난해 동짓달부터 무언의 약속을 기다렸구나.

그 기다림마저 숭고한 아픔이었구나.

겨우내 창가에서 기다렸던 동백꽃을 봄으로써 나의 봄은 벌써 시작되었다.

2월은, 봄이다.



image.jpg 오늘 아침 기다리던 동백꽃이 화알짝 피었다, 나의 봄은 시작이자 완성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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