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 집에 줄기가 분수처럼 사방팔방 솟구친 식물이 왔다.
먼지를 먹고사는 식물이라는데 생김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만져보니 도톰하고 까칠했다.
음, 생긴대로구먼.
막 굴러도 생존에 지장 없는 독종이라 여겼다.
무심하게 두면서 물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겠거니..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밤톨 같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가끔 내 넋두리 들어주는 친구처럼 사이드테이블에 가까이 두었다.
처음에는 나무 컵받침 위에 동그랗게 돌멩이를 올리고 그 가운데 두었다.
사막의 선인장 같은 느낌, 돌과 잘 어울렸다.
털이 쭈뼛쭈뼛 솟은 고슴도치를 닮아서 '고슴'이라 불렀다.
며칠 지나자 고슴이가 사는 집이 단조로워 보여서 새로운 집을 꾸며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백색 커피잔에 둥근 조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인수봉 바위산을 닮은 검은색 돌을 세웠다. 그 가운데 고슴이를 놓아주었다. 세상 하나뿐인 집이 커피잔에 생겼다.
들고서 옮기기 간편한 이 집은 도자기 재질 둥근 벽에 둘러싸여 검은색 회색 흰색 돌멩이들이 멋스럽게 포개져 있다. 물을 좋아하지 않는 고슴이는 이 척박한 바위산에 앉아서 무럭무럭 자라주길 바랐다.
그래도 살아있는 식물인데 물을 안 줄 수는 없다.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가끔 생각나면 주었다.
고슴이를 달랑 들어 주방 물통 속에 넣어두었다.
한 시간쯤 지나 물을 실컷 먹었겠다 싶으면 건져서 제자리에 두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키가 자라지 않는다.
외로워서 그런가?
두어 달 전 화원 갔을 때 분홍색 동족(틸란드시아 이오난사)이 있어서 데려왔다.
몸집이 고슴이보다 훨씬 크고 우량했다.
성별이 정해졌다. 초록색 고슴이는 남자, 분홍색 이오난사는 여자이고 이름은 도치.
덩치 큰 도치를 바위산 정가운데 앉히자 몸집이 작은 고슴이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커피잔 테두리에 걸쳐 앉은 고슴이는 뿌리가 덜렁 들려 떨어질 것 같았다.
돌멩이를 고르게 한 다음 다시 자리를 잡아주었다.
이제 너희 둘은 한집에서 사이좋게 살아가거라.
바위산에 살아가는 고슴과 도치는 주변 돌멩이들과 오방색으로 어우러져 초록색 분홍색 너무 잘 어울렸다.
자리가 협소한 고슴이 불평하는 소리가 가끔씩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2월의 백설이 난분분 흩날리던 아침 이 둘은 크게 싸운 것 같았다.
서로 토라져서 이번에도 고슴이가 컵 바깥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삐죽이 솟구친 잎이 더 가시를 돋워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고슴과 도치는 자존심이 강한 족속이다.
자기가 숨 쉬는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면 가차 없이 신경질을 냈다.
지금까지 정립한 가치관이 무너지는 것은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자질구레한 습관의 충돌은 이해할 수 있으나 핵심 가치를 뒤흔드는 비방과 예의에 어긋나는 언행은 참을 수 없다. 내가 숨 쉬는 공간은 나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하는 독립적인 공간이다.
이 최소한의 공간을 서로 침투해버린 고슴과 도치를 억지로 다시 붙여놓았다.
"제발 사이좋게 지내렴!"
서로 붙여놓아서 갑갑해하는 이 둘에게 물 주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이 주가 지나고 삼 주가 지나려 할 때 비실비실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둘을 가볍게 들어서 물통 속에 첨벙 던져주었다.
두어 시간 잠긴 녀석들은 금세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한동안 물주는 걸 잊어도 되겠다고 안심하였다.
겨우내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동백이 창가에서 붉은 꽃을 마침내 피우던 지난주부터 고슴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줄기 끝부분이 노랗게 타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도치는 멀쩡했다.
왜 그러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 상태에서 더 나빠지진 않았다.
곧 새봄이 되면 푸른 잎이 나와주겠지.
나의 관심이 온통 붉은 꽃 세 송이를 활짝 피운 동백에게 가 있음을 눈치챈 걸까.
이번에는 도치가 시들시들해졌다.
분홍빛 화색이 시름에 잠겨 갈색으로 변해갔다.
한두 줄기 그러다 말겠거니 여겼는데 불과 사흘 만에 중심이 무너져 내리고 시들어버렸다.
건강미를 뽐내던 도치를 바위산에서 치울 수밖에 없었다.
고슴이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 너른 집을 독차지하고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친구를 잃어버린 데다가 상태가 양호하지 못하다.
조만간 새 친구를 데려와야겠다.
도치가 사라지고 나서 틸란드시아 이오난사 키우는 법을 찾아보았다.
- 일주일에 한 번 10분~20분 몸 전체를 물에 담가주세요.
- 20분 이상 오래 담글 경우 과습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 물이 고인 부분 없이 탈탈 털어서 반나절 정도 물기를 잘 뺀 후 컵 속에 넣어주세요.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좋아하는 것은 더 자주, 싫어하는 것은 안 하면 된다.
호불호를 알아차리고 행함에 있어 눈치와 배려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평균적인 사람들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상대도 싫어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도 좋아한다.
의식주 기호품을 떠나서 인간 생존의 긍정적인 덕목에 대해서 말함이다.
그 한 끗 차이를 알아차리는 데 섬세한 마음의 감각이 필요하다.
더듬이라 불러도 좋겠다.
고슴과 도치는 서로의 더듬이를 길게 빼내어 더듬으며 부대끼지 않고 잘 살아가는 간격을 알고 있었다.
거친 바람 불고 흐린 날에는 서로의 예민함을 알아채고 조심하였다.
각자의 공간에서 사색에 잠겼다.
그러다가 부드러운 햇빛이 돌멩이에 부서져 무지갯빛 가시광선이 눈부신 날에는 손을 맞잡고 산책을 나갔다.
싱그러운 공기를 마시며 들꽃을 구경하고 들바람에 풀잎처럼 기운 감정이 평온한 수평선으로 흘렀다.
무심한 내가 깊이 잠든 밤에도 이 둘은 달빛 흐르는 산등성이에 사이좋게 앉아서 '문리버(Moon River)'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Oh, dream maker, you heart breaker
Wherever you're goin', I'm goin' your way
...
We're after the same rainbow's end
Waitin' round the bend, my Huckleberry friend
Moon river and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