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 희뿌연 미세먼지에 갇혀 시간의 무중력 지대 부유하다 보니 봄이, 어느새 성큼 당도하였다.
포르스름한 해쑥이 엄지손톱만큼 땅에서 솟구쳤고, 산수유 나뭇가지에는 샛노란 나비들이 태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꽃망울들이 맺혀 있다. 섬세한 눈길을 주지 않으면 놓쳐버리는 아주 미묘한 변화를 오늘 비로소 알아차렸다. 벽지를 고르느라 도배집으로 분주히 다녀오는 길에 알게 되었다.
갈 때는 칙칙했던 시야를 푸르게 열어주는 전나무 숲길로 가서 몰랐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원길을 걷다가 노란 저고리를 수줍게 갈아입는 산수유나무를 보면서 걸음이 멈추었다.
'알아차림'이란 무엇일까?
나의 고정관념에 갇혀버리면 끝내 모르는 어떤 경계에 서서 늘 깨어있는 의식 아닐까.
나의 인상과 정체성을 만드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 의식과 무의식, 나를 둘러싼 세상과의 긴밀한 의사소통, 눈과 귀를 활짝 열고 직감의 안테나를 높이 세우는 것, 말 없는 저 우주 너머에 이르기까지...
단단한 바위는 모를 것이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가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나아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운석으로 떠돌다 새카맣게 타서 지구 바닷속 깊숙이 떨어진대도 모를 것이다. 바위는 빅뱅의 어둠이 똘똘 뭉친 그 내면에 우주의 시간을 말해줄 뿐이다.
감정이 무디고 무뚝뚝한 사람을 우리는 목석같다 말한다.
이 말은 유감스럽다. 그냥 바위같다 말하면 된다.
목은 아니다. 나무는 너무나 '알아차림'을 잘하는 생명체이다.
바람과 빛의 조화로움을 잘 알아차리는 나무는 그 민감한 낌새를 단 하루 만에 자신의 변화로써 받아들인다. 내가 미세먼지에 갇혀 허우적거릴 때 나무는 재빨리 겨울의 허물을 벗고서 봄의 증거를 내밀었다.
알아차림에 둔감한 나는 이 봄 집안의 허물을 벗기기로 하였다.
이 집에 이사 와서 십 년이 지나고 보니 벽체가 입고 있는 벽지가 여기저기 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들 방을 부분적으로 도배하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작은딸 방 벽지는 이 집 이사 올 때부터 내 눈에 거슬렸었다.
회색 톤 세로 줄무늬 안에 낙서같이 난잡한 선들이 뒤엉킨 무늬가 마음에 안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이 방을 차지한 딸이 사춘기를 지나며 방황한 것도,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것도 저 회오리바람이 늘상 부는 벽지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 무늬가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소용돌이도 이내 잠잠해지는 고요한 평정심 같은 민무늬였다면 아이의 무의식은 별 까탈부리지 않고 성장했을 것이다. 진작에 뜯어버릴걸. 학업을 수행함에 있어 방해요인이 될까 봐 또 튼튼한 벽지의 건재함으로 미루었는지 모르겠다.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 남들보다 1년을 번 아이는 올해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어쩌면 작은딸은 사면에 그려진 혼란스러운 벽지 방에 갇혀서 자신과의 지루한 싸움 끝에 이긴 것이다. 나는 그런 딸이 대견하여 서둘러 도배공사를 하는 거라 변명해 본다.
큰딸은 크림화이트 벽지를, 작은딸은 엷은 핑크색과 크림화이트를 골랐다.
두꺼운 벽지 샘플을 보다 보니 내가 기거하는 안방에도 갈아입고 싶은 벽지가 눈에 띄었다.
패브릭 느낌 은은한 핑크베이지색이 태양 꽃이 낙화하는 저녁노을을 닮았다.
포인트 벽지로 두 벽만 하기로 결정하고 나니 덩굴 식물이 꿈틀대며 자라 오르는 지금의 벽지가 뜯길 생각에 서운하면서도 빼고 넣는 짐들의 행렬로 어수선할 주말이 환하게 봄을 맞이하는 작은 소동 같아서 조금 즐겁다.
요즘은 건축가 안도 다다오에 의해 제시된 노출 콘크리트 벽체를 어디서건 흔히 볼 수 있다.
건물 외장 소재로 쓰이는 벽돌이 내부로 들어와서 회벽과 마주하면 리버서블 옷을 입은 듯 공간은 파격적으로 변신한다. 다소 실험적이고 모던한 인상을 주는 이런 벽체는 전시장이나 박물관 카페 등 넓은 공간에 어울린다. 아무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어도 거부감 없는 노출 콘크리트 벽 위에 색채를 총망라한 그림을 걸어두면 관람객의 시선이 온전히 그림에 몰입되어 전시 효과는 배가 된다.
그렇다면 덕지덕지 칠한 내면의 색을 지우는 것도 몰입감과 집중력을 더해주는 유의미한 작업이 된다.
잡동사니들이 차지한 색을 지우고 투명한 여백을 넓히면 되살아난 그 공간으로 숨통이 트이면서 바람이 불어온다. 미세한 바람결에 민감해진 나는 작은 변화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맑은 물로 구정물을 여과하는 자정작용이 진행된다.
이것이 자기 정화의 알아차림이다.
요 며칠 사이 화엄사 홍매가 만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브런치 이웃님이 알려주셨다.)
삼백 살 수피에 이끼가 서린 고목은 부대끼는 세월을 살아내느라 척추가 휘었는데 이 봄 누구나 한 번 바라보면 반하고야 마는 요염한 꽃들을 피운다. 수많은 꽃들 하나하나 생김새가 고운 인상을 간직하고 있다. 젊고 싱싱한 나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혹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더구나 무채색 기와지붕을 배경으로 한 수행처에 무심히 획을 그으며 진분홍 색을 발현하여 더 눈길을 끈다. 노파가 하룻밤 새 미인이 되는 이 마법 같은 변신 또한 봄이어서 가능하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가.
꽃이 펴서 봄이 오는가.
추위를 물리쳐가며 피어난 꽃들이 애틋하여 봄이 오는 건 아닐까.
나이를 먹을수록 더 고운 꽃을 피우는 화엄사 홍매 한 그루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려고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건 아닐까.
육신은 주름져 늙어가도 정신은 더 화려하게 꽃 피울 수 있다는 진리를.
일백 년을 살아도 추한 몰골뿐이라면 더 살아서 무엇하리.
살아갈수록 향기로운 깨달음에 이른 죽음은 어딘가에 다시 환생하여 자신의 영속성을 우아하게 펼쳐 보이리.
죽은 듯이 보이는 겨울을 지나 해마다 어렵사리 순조로이 찾아오는 만고의 진리, 봄이 그 증거이다.
_손혁건
바람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앞을 보지 못해 아무 데나 부딪혀
멍이 들면 싹이 돋고
피가 나면 꽃이 피는
바람에 눈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산을 비켜 내달리다
들판에 떨어진 햇살 꼬리 붙들어
휘적휘적 강으로 가는
흔들리며 흔들리며
바람 사이에서 길을 찾는 너는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오는가
- 손혁건 시집 < 달의 잔상 > 중에서